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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군위신문 |
유비(劉備)가 조조(趙操)라는 국력이 거의 열 배나 강한 거대한 적에 대비하기 위해 손권(孫權)과 동맹전선을 펼치기 위해 제갈량(諸葛亮)을 사절로 보냈다.
그러나 손권의 막하 장수 주유(周瑜)가 조조를 치기에 앞서 장차 후환이 되리라 예견한 제갈량을 죽이기로 하고 불가능한 군령(軍令)을 내렸다. 열흘 안으로 화살을 10만개 만들어 오라고.
제갈량은 그로부터 3일 후에 조조의 진채 앞 항구가 안개가 짙어 강 위가 보이지 않을 기상예보를 알고 배 스무 척에 짚단이며 풀다발을 싣고 갑자기 북소리와 함성을 크게 울렸다. 조조가 지시하길 짙은 안개 속에서 적군이 몰려왔으니 반드시 매복이 있을 것이다 하여 접근하지 말고 소리 나는 쪽으로 활을 집중적으로 쏘라고 명령을 내려 날아온 화살들을 촉하나 상하지 않고 받아 모은 것이 10만개가 넘었다.
적벽대전(赤壁大戰),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해 유비와 함께 조조에게 저항하게 한 커다란 싸움이다. 손권의 휘하 장수 황개가 칼을 들어 휘두르자 앞의 배들에 일제히 불이 붙었다. 불은 제갈량이 일으킨 동남풍의 위세를 따라 일고 바람은 불의 위세를 더했다. 20척의 화선(火船)들은 연기로 하늘을 가리면서 쏜살같이 조조의 수채(水寨)로 들이 닥쳤다. 손권과 유비의 군사는 합하여 5만이었고 조조의 군사는 5배가 되는 25만이었으나 대패했다.
관우( 關羽)가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는 오만해도 못한 사람에게는 모질지 못하여 의(義)로서 쫓기는 조조에게 길을 내줌으로서 화용도(華容道)를 빠져나와 뒤를 돌아보니 조조를 따라오는 장졸은 27기(騎)에 지나지 않았다.
제갈량이 “무엇들 하는가? 조조를 일부러 놓아 보낸 관우를 어서 끌어내 목 베어라”라고 호통을 치는데 유비가 용서를 구했다. 이때부터 제갈량과 관우의 서열 다툼에서 제갈량의 우위가 확보되었다.
손권이 자기 여동생 손부인(孫夫人)을 내세워 미인계(美人計)로 감부인(甘夫人)을 잃은 유비에게 시집가도록 하면서 자기 휘하에 묶어두려는 계략을 펼쳤다. 그러나 유비는 손권의 면전에서 뒤따르던 자들이 차고 있던 칼을 빌려 들고 하늘을 올려 보며 속으로 가만히 빌었다.
“만약 나 유비가 다시 형주(荊州)로 돌아가 무사히 왕패(王覇)의 업(業)을 이룩할 수 있다면 한 칼질에 이 돌이 둘로 갈라지리다. 만약 여기서 죽어야 한다면 칼은 부러지고 돌은 쪼개지지 않도록 하소서!” 그리고는 번쩍 칼을 쳐들어 그 돌을 내리쳤다. 불똥이 어지럽게 튀며 돌은 그 한 칼에 둘로 갈라졌다.
사실련(사회정의실현시민연합) 중앙회 대표 박두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