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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울림(8)

admin 기자 입력 2015.06.09 18:11 수정 2015.06.09 06:11

ⓒ N군위신문
유비(劉備)는 제갈량(諸葛亮)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권유를 받아 두 번 세 번 거듭 사양하다가 나중에야 겨우 아들 유선(劉禪)을 세자로 삼고 한중왕(漢中王)에 올랐다. 이어서 제갈량은 군사로 관우 ,장비, 조운, 마초, 황충 다섯은 오호대장(五虎大將)으로 세웠다.

조조(曹操)의 장수 서황(徐晃)과 번성에서 나온 조인이 앞뒤에서 힘을 합쳐 들이치니 관우(關羽)의 무예가 아무리 뛰어났다 해도 아직 독화살에 맞은 오른팔이 다 낫지 않아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또한 손권(孫權)의 장수 여몽(呂蒙)이 맥성(麥城) 인근에서 쳐둔 그물로 관우가 탄 말을 밧줄로 걸어 넘어뜨렸다. 드디어 관우는 마충(馬忠)이란 자에 의해 사로잡혀 손권 앞에 끌려왔으나 유비와 복사꽃 핀 동산에서의 의를 되뇌며 항복하지 않아 쉰여덟에 죽임을 당했다.

마충은 관우가 타고 다니던 말을 손권에게 바쳤으나 손권은 다시 마충에게 그 말을 하사하여 뽐내면서 타고 다녔으나 풀 한포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다가 며칠 뒤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관우의 충의가 그 말에 옮은 것이라 여겨 한결 같이 신기하게 생각했다.

상당히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중국인도 관우를 말할 때 우리처럼 관우나 관운장이라 부르지 않고 꼭 관공(關公)이라고 높여 부르고 있다. 또 관공은 뒷날로 갈수록 높여져 관왕(關王)에서 관성대제(關聖大帝)로, 유림(儒林)에 필적하는 관림(關林)으로 마침내는 신(神)으로까지 널리 추앙 받고 있다.

조조는 예순 여섯에 병사했는데 그 한 몸에 너무 많은 재능을 갖추고 있었고 그것이 다스림을 받는 쪽에서 보면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역사가 폭군으로 기록하는 제왕들의 공통된 특징은 학자나 문사를 박대하였는데 필자의 생각에 조조는 무장(武將)들에게는 관대했던 반면 문신(文臣)들의 실수에는 가혹했기에 시대가 흐르면서 뒷시대의 학자나 문사들을 자극하여 나쁜 쪽으로 평가되었다고 본다.

장비(張飛)가 낭중(閬中)으로 돌아가서 의형인 관우장군의 원수 갚음을 위한 채비를 하면서 흰 갑옷과 깃발을 사흘 안으로 마련하라는 명령을 받은 범강(范彊)과 장달(張達)이 기한을 늘리러 갔다가 죽도록 매질을 당하자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그날 밤 장비를 죽이고 동오(東吳)로 달아나 버렸다. 장비의 나이 쉰다섯이었다.

사실련(사회정의실현시민연합) 중앙회 대표 박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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