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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劉備)가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손권(孫權)의 오(吳)로 출병했다. 그러나 유비가 제갈량과 마초, 조운 같은 맹장들을 촉(蜀)에 두고 여력을 모아 나선데 비해 손권은 한당, 주태, 서성, 정봉 같은 역전의 노장들을 모두 나서게 했다.
그리하여 촉병의 유비는 효정, 이릉의 싸움에서 손권이 최근에 중용한 육손(陸遜)의 화공법(火攻法)에 대패하여 겨우 백여 명의 장졸에 호위를 받아 백제성(白帝城)으로 피신했다.
백제성에 있던 유비는 뉘우침과 한스러움이 병이 되어 누었는데 죽음을 예견하고 성도(成都)로 사람을 보내 제갈량(諸葛亮)을 불러 들였다. 이어서 어린 아들 태자 선(禪)을 돕도록 부탁하고 그 재주가 모자라 도와도 안 될 인물 같으면 스스로 성도의 주인이 되라고 유언을 하고 죽으니 나이가 예순 셋이었다.
유비가 이끄는 집단은 제도나 법보다는 의리와 인정 같은 임협적(任俠的) 원리에 지배된 사조직(私組織 )에 가까웠다. 수백년 부패한 한(漢)의 관료제에 시달려 온 민중들에게는 호감이 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중국의 백성이 가장 좋아하는 황제의 상은 자신의 다재다능에 힘입어 유위(有爲)의 치(治)로 시종한 조조(曹操)와 대조되는 한고조(漢高祖)나 유비와 같이 도가(道家)의 원리에 따른 무위(無爲)의 통치자였다. 대부분의 수명이 긴 왕조는 도가형(道家型)의 창업자로 시작해 유가형(儒家型)의 치자로 유지되다 그 유가형의 부패로 멸망했다.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삼국지 연의(三國志 演義) 전편을 통해 남쪽 오랑케 남만(南蠻)의 왕(王) 맹획(孟獲)이 가장 흥미 있는 인물이다. 맹획이 익주 기수 옹개와 연대하여 촉(蜀)의 땅을 침략해 오자 제갈량이 평정하러 가는데 마속(馬謖)이 건의하길 “남쪽 오랑케들은 오늘 힘으로 눌러 놓아도 내일이면 다시 들고 일어날 것이니 마음으로 싸워 이기는 게 군사로 이기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이에 제갈량은 맹획을 일곱 번이나 사로잡았으나 마음으로 항복할 때까지 기다려 계속하여 풀어 주었더니 진심으로 항복하여 남쪽 지방은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촉에게 평정된 것이었다.
맹획은 불타는 민족 지도자의 독립심으로 강력한 촉군과 싸워 조국의 식민지화(植民地化)에 눈물겹게 저항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갈량이 맹획을 상대로 벌였던 갖가지 왕화(王化)정책은 근대 서구의 식민지 정책보다 돋보이는 데가 있었다.
나관중 지음, 이문열 평역, 사실련(사회정의실현시민연합)중앙회 대표 박두익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