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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사라온 이야기 (1)

admin 기자 입력 2015.07.19 21:42 수정 2015.07.19 09:42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옛날 조선시대 관아(官衙) 자리에 사라온 이야기마을 이라는 역사문화재현테마공원이 군위군의 문화산업으로 탄생한다.

조선의 정치, 관직(官職) 사회 ·문화·민속·자연, 역사의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전시실과 관광객들의 체험 공간으로 조선시대 민가, 조선시대 관청, 조선시대 의병 본거지로 나누어져 있다.

선조들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과거의 군위를 재발견하고, 한시대 한민족이 남긴 문화적 자취를 새롭게 재현한 적라촌은 마을 공동체 속에서 평화를 지키며 살아 가는 지혜로운 민중들의 이야기로 체험시설은 성황당, 점집, 기생학교, 다원, 도화원, 서당, 주막, 민가 풍속체험장과 적라청은 마을의 분쟁을 다스리고 백성의 안전을 지키는 의로운 관리들의 이야기 공간이며, 적라골은 왜적의 침략에 맞서 마을의 안녕을 수호하는 용맹한 의병들이 이야기 공간이다.

먼저 문화(文化)란 무엇인지 개념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문화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문화라는 말만큼 정의하기 어려운 말도 드물다.
문화생활 이라는 말은 현대 서구풍의 편리함을 생각나게 하지만 ‘문화재’(文化財)라고 하면 고대의 유물·유적 또는 민속과 전통을 연상하게 한다.

요즈음에는 화장실문화, 음주문화라는 말까지 사용 하는데 이럴 때 문화는 아마도 무언가 다른 사람을 배려 하는 품위와 예절 등을 뜻할 것이다.

말의 의미가 애매할 때 우리는 그 말이 어떻게 생겨 났는지를 따져 본다면 문화라는 말은 상당수의 우리말 학술어가 그렇듯 영어 culture를 일본인들이 文化라고 번역해 놓은 것을 광복 후 우리가 그대로 쓴 데에서 생긴 말이다.

그런데 영어 culture는 흥미롭게도 경작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culture에서 온 것이다.
경작이라는 말은 인류가 자연상태에서 먹이를 채취하거나 수렵하는 단계를 벗어나 인위적으로 농경지를 조성하여 밭을 갈아 농작물을 기르게 되면서 생긴 말이다. 어원적 의미로 미루어 보면 결국 문화의 일차적 의미는 인간이 살아 가기위해 자신들의 삶의 환경조건인 자연상 태를 있는 그대로 두지 않고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자기식으로 변형 시키는 것 또는 변형시킨 것을 의미한다.

문화는 자연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에다가 인위를 가한 것이 문화이다.
즉, 인간은 동물처럼 그저 본능에 의지하며 자연 그대로에 대응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고 계산해 가면서 계획을 세워 인위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가며 대응해 온 것이다.
문화라는 어원을 먼저 이해해야 문화를 보유한 각 집단의 상황과 전통 및 변화를 반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조건축의 유형』

건축의 유형을 나누자면 우리나라의 경우 하나는 궁궐건축으로 지배자인 왕이 살고 있었던 계급적 관념으로 이해 할수 있지만 그 시대 문화역량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는 건축물이 궁궐 즉, 王宮으로 우리 역사 속에 궁궐과 종묘사직이 남아있다.

삼국의 고구려 신라 백제 궁은 하나도 없고 고려개성에 있던 정궁인 만월대도 불타 버리고 없다.

종교건축으로는 우리가 보는 무수한 사찰들과 근대유산으로 명당성당 등이 있다.
우리는 조선시대 관아건물이 온전히 남아 있는게 단 한건도 없는데 조선시대 330개 군현이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사람들이 주재소(駐在所)를 만들고 8.15해방이 되고 난후 그 자리에 면사무소 읍사무소를 만들어 신시가지를 형성 하면서 종래에 있었던 관아 건물들이 쓸모가 없는 건물이 되니까 그 자리에 초등학교나 중학교가 들어 서게 된것이다

목조건축으로 잘 보존되고 있는 향교와 서원은 지역에서 활동 하고 있는 지방유림들이 석전제를 지내면서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Q. 고을 관아를 왜 동헌(東軒)이라 부를까?

동헌(東軒)은 조선시대 지방관들이 정무를 집행 하던 관아건물을 가르키는 말이다
지방관아에서 고을 원(員)이나 감사(監司) 병사(兵使) 및 그밖의 수령들이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이 곧 동헌(東軒)이다.

일반적으로 지방관아는 담으로 둘러싸인 중앙에 정문을 내고 정문 안에는 다시 담을 쌓아 수령이 공무를 보는 외아(外衙)와 수령 가족이 생활하는 내아(內衙)를 두었다.
이때 외아(外衙)가 내아(內衙)의 동쪽에 있었기에 동헌(東軒)이라 불렀고 상대적으로 내아(內衙)를 서헌(西軒)이라고 했다. 방위상 동쪽을 양(兩), 서쪽을 음(陰)으로 보아 동쪽에 공무집행 건물을 둔 것이다.

나중에는 동헌 자체가 관아 명칭으로 여겨져 외동헌(外東軒) 내동헌(內東軒)이라 불렀으며 동헌(東軒) 정면에는 ○○당(堂) ○○헌(軒)의 현판을 달았다.

『구전으로 전해 오는 이야기』

현재의 역사테마 북쪽 담장에 오래 묵은 느티나무 두그루가 나란히 서있다.
옛날 원님이 계시던 현아(懸衙)에서 객사(客舍)로 가는 길옆에 어느 현감이 심었다고 전해지며 20여미터 높이의 나무 둘레는 약 5m로 나무의 나이는 알수 없으나 300여년이 넘었다라고 전해진다.

매년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날에 길이 30자 넓이 20자가 넘는 큰 부처님 화상(畵像)을 이 느티나무에 걸어 놓고 부처님의 탄신을 축하하고 이 고장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도록 빌었다고 한다.

또한 가뭄이 극심할 때 화상을 걸어 놓고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고 하며 기우제를 지내고나면 반드시 그 날밤에 비가 내렸다고 한다.

1920년 까지도 화상을 걸고 기우제를 지냈는데 그 후 화상도 없어지고 내려오던 풍속도 없어졌다

객사(客舍)는 조선시대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며 사신이나 조정에서 공무를 보러 오신 분들의 관사로도 쓰였다

민담에 전해 오는 이야기로 이 느티나무에 그네줄을 걸고 원님딸이 그네를 타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전해진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이면 느티나무는 바람에 부딪쳐 나무 구멍마다 괴이한 소리가 났다

초등학교를 다닐때 이 느티나무를 지나치는 서부리 학생들은 귀신이 된 원님 딸이 나타날까봐 머리카락이 솟구치는 두려움에 “빨리가자~ 빨리가자~”라고 서로 손을 잡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마도 부처님 오신날과 기우제를 지낼때 부처님 화상을 걸어 놓고 행사를 했던 것을 오랜 세월속에 원님 딸이 죽어 영혼을 위로 하고자 했던 것으로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느티나무의 속은 썩어 없어지고 바깥쪽 껍질만 남아 있지만 오고가는 길손의 휴식처가 되어 있으며 새롭게 지어진 관아를 지켜보고 있다.
전설이 깃든 느티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 참고자료 *
쪾문화체육시설사업소 (테마공원 운영기획)
쪾군위군 문화원 발간 우리고장 보호수와 노거수

다음편에는 조선은 관료국가로서 공무원 등급과 군위문화원에서 발간한 조선왕조실록 군위사료집에서 군위군과 관련된 주요실록 역대수령 자연재해를 발췌하여 실어 드리겠습니다.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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