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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온 이야기 (2)

admin 기자 입력 2015.08.02 21:26 수정 2015.08.02 09:26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역사문화재현테마공원의 중심부에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덕치(德治)관아가 자리잡고 있다.
덕치는 덕으로 백성을 잘 다스린다는 공자의 유교적인 인(仁)의 사상으로 성리학을 조선의 정치이념으로 삼았으며 또한 조선의 정치체제는 중앙 집권적 양반 관료제로서 고려에 비해 중앙집권체제가 보다 강화 되었음을 뜻한다.

양반 관료제는 단순히 관제상의 문·무반을 뜻하는 고려시대의 양반제도와는 달리 조선시대에 관료가 될 수 있는 신분층 곧 사대부 계층이 따로 생겼음을 의미한다.
관료임용에서 고려는 과거(科擧)보다 음서(蔭敍)의 비중이 컸으나 조선에서는 과거를 훨씬 중시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정치기구는 형식상 문반(文班) 무반(武班)으로 양립 되기는 했으나 문반 위주로 운영 되었다.

조선시대 사회의 지배층인 사대부란 “독서인은 사(士)요 종정(從政)은 대부(大夫)라 한것 처럼 글을 읽고 과거에 급제 하여 정치에 참여하는 계층이었다.

지방 행정조직은 주(州)는 관찰사 부(府)는 부사 목(牧)은 목사 군(君)은 군수 현(縣)에는 현감으로 이 모두를 통틀어서 수령(守令)이라 부른다.

관찰사(觀察使)는 도내의 각 수령을 감독할 임무를 띄고 행정 사법뿐만 아니라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를 겸했으므로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각 고을 수령은 고을의 차등에 따라 종 2품에서 종 6품까지 위계차가 있었는데 모두 행정권 사법권 이외에 첨절제사(僉節制使)이하의 군사권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수령의 임기는 3년이고 역시 출신지에는 임명 되지 않는다.

<수령칠사 (守令七事 )>

수령의 임무는 농업의 장려,호구의 확보, 교육의 진흥, 군정(軍政)의 수비(修備)부역, 사송(詞訟) 및 향리의 지휘 감독 등으로 요약 되는게 수령의 칠사(七事)인 것이다.

수령에 대한 관찰사의 근무 평정은 4등급으로 중앙에 보고 되었는데 이를 전최(殿最)라 하고 그 성적은 승진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 하려면 반드시 수령을 역임해야 했으므로 수령의 근무 평정은 당상관 진출에 큰 영향을 주었다.

관찰사와 수령 밑에는 중앙의 육조체제인 육방(六房)을 두고 지방행정의 실무를 담당하게 했는데 그것이 향리(鄕里)이다.
향리(鄕里)는 아전(衙前)이라고 하며 비록 신분은 낮았으나 수령과 백성의 중간에 위치해 그세력이 대단하였다.

지방의 중요사무는 호장(戶長)과 이방(吏房) 형방(刑房)이 관장 했으며 이들을 일명 삼공형(三公兄)이라고 하였다
조선초기에는 관청의 기강이 엄해 향리의 부정부패가 적었으나 조선중기 이후 기강이 해이해 지면서 향리가 수령과 결탁하여 마음대로 사욕을 채웠다 .

향리에게는 사실상 토지나 녹봉을 주지않아 제도상의 결함(缺陷)이 부정부패의 요인이었다 .
게다가 수령들은 대개 사무에 어둡고 임기가 짧았으므로 고정적인 향리가 지방행정의 실권을 지고 튼튼한 토착세력으로 자리잡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정약용은 이러한 수령과 향리와의 관계를 강류부전석(江流不轉石)이라고 비유하였다.
수령은 흘러 가는 강물과 같고 향리는 구르지 않는 돌과 같다는 뜻이다.
관료의 등급은 품(品 )또는 유품(流品) 이라고 하여 크게 9품이 있었다.

각품에는 정(正)과 종(從)의 구별이 있어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으로 되어 있으며 다시 정1품에서 종 6품까지 상하 계(階)가 있으므로 관료의 등급은 모두 30계로 되어 있다.
영의정이 정 1품이며 정3품 上 이상을 당상관이라 하며 임금님과 대청 위에 앉아서 대화를 다눌수 있다는 뜻이다.

정3품 下이하는 당하관으로 6급을 기준으로 참상관과 참하관으로 나뉜다 .
참상관은 임금님하고 감히 마주 앉을 수 없고 서 있는 사 이며 참하관은 임금님하고 알현이 어려운 사이다.

문과시험을 치고 나면 33명을 뽑는다.
그 중에 1등 장원급제는 6급부터 시작을 하고 나머지 32명은 7급부터 시작을 한다.
군현제를 일원화 하여 속군 속현은 없애고 중앙에서 수령을 모든 군현에 직접 파견하게 된다.

파견된 수령에 의해 민생의 기쁨과 슬픔은 온전히 수령에게 달렸고 수령의 현명한 덕치는 백성을 편안하게 보살피며 농업을 중시하며 공부를 장려 시키며 고을의 전통 맥을 잘 지켜 수령칠사를 잘 지켜 본연의 임무를 가져야 한다.

<남태보 현감(1748~1753)의 업적인 적라지(赤羅誌)>

조선 21대 영조때 군위현의 현감으로 있었든 지현(知縣)남태보(南泰普)는 옛날 우리지방 선조인 정애(鼎厓)홍승(洪昇)공께서 일찍 우리고을의 자료를 모은바 있었다.

남현감 태보가 들은 바를 더하여 편집을 완성하고 적라지라 이름 하였으되 인쇄에 부치지 못하고 오히려 군안(軍案) 즉 군의 안건으로 둔지가 200년이 되는 바이니 종이가 털나고 글장이 떨어지며 글자가 그을으고 획이 이그러저서 거의 문헌을 장험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갑술년에 있어서 오군수 재순(在淳)이 군에 부임하여 여지장(輿誌章)떨어짐을 보고 탄식하여 가로되, 오직 사는 백성의 관계되고 중함만이 아니오, 벼슬하는 자의 요람(要覽)인즉 어찌 간행함을 도모 하지 않으리오 하고 이에 한 고을 선비 백성으로서 더불어 의논이 있었음이 수년인데도 성취하지 못하고 갈음 하였으니 어찌 고을 백성의 불행함이 아니리오 하며 탄식하였다.(중략)

300餘年 前 고을 선비 홍승공(洪昇公)께서 읍지를 기록 하기 시작 하여 그로부터 50년 후에 남태보(南泰普)현감께서 재임 동안 많은 업적을 이룩함과 아울러 위의 읍지를 적라지라 이름하고 1.2권을 편집(編輯)하였다.

적라지에 실려 있는 읍호(邑號)군위고을을 신라때부터 왜 적라(赤羅) 라고 불렀을까
노동면혁, 적라(奴同覓縣, 赤羅) 옛날 계림(경주)이 나라의 서울일때 벼슬하는 사람이 이고을에 많이 살았다.

벼슬하는 사람은 붉은 옷의 도포를 입었다.
백성은 그 옷빛이 다름으로 구별을 하였다.
신라는 골품제도를 기반으로 백관의 의복을 제정 하였는데 진골 이상과 6두품 5두품 4두품의 색깔이 달랐다.

비단옷 붉도다 하는 노래가 있었으니 고을이름을 적라라고 불렀다고 전해 지는 것을 보면 이 고을에 진골 이상급이 자의를 입었던 귀족들이 살고 있지 않았나 추정해 본다.
군위초등학교 교가(校歌) 첫머리가 적라산 봉우리에 노을이 지면 병천에 흐르는 물 끝이 없는데 라고 나온다.

병천(幷川)은 고을 남쪽 11리에 있는데 의흥고을 남천 및 부계고을 남천이 합하여 같이 흐르는 강의 이름이다. 군위군을 지나서 북쪽 비안고을 남천이 된다. 또한 봉수(烽燧)봉화(烽火)는 변란을 알리기 위해 봉홧둑에서 횟불(야간)과 연기(주간)로 신호 하는 곳으로 마정산봉수(馬井山烽燧)는 남으로는 박타산을 응하고 북으로는 비안고을 간점산에 응한다.

박타산봉수(博陀山烽燧)는 남으로는 의흥 토현에 응하고 북으로는 마정산에 응하였으며 임진왜란 뒤에 길이 곧지 아니함으로서 마정산에 봉수를 합쳤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을 선비들이 오랜세월 역년(歷年)동안의 고을 내역(來歷의 귀중한 기록들을 담아내어 후대에 전하고자 했던 적라지는 우리 고을의 역사를 알게 해 주는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계속) / 참고문헌『 赤羅地 』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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