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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사라온 이야기(3)

admin 기자 입력 2015.08.16 20:40 수정 2015.08.16 08:40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사라온 이야기 마을 관청의 정문은 환희문(歡喜門)으로 기쁜 마음으로 관청에 들어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옛 관아의 정문이었던 관민루(觀民樓)는 현재 환희문으로 바뀌었고 또한 지지(地誌)에 실려 있는 권경루(勸耕樓)의 위치는 동헌(東軒) 오른편에 있었는데 임진왜란때 불탔다고 한다.
금상임신(今上任申1752년) 남태보 현감이 동헌에 나아가는 오른편에 다시 세우니 준희루(晙喜樓)이다.

처음의 권경루(勸耕樓)를 준희루(晙喜樓)로 이름을 고친 것이다.
관민루도 권경루도 준희루도 세월속에 본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지만 이름만이라도 한번쯤 되새겨 본다면 지난 시대와의 간격을 메워주는 가교 역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적라촌의 주제는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동제당과 돌탑 성황골 점집이 있는데 간단한 신수점을 쳐보며 체험을 해 보는 공간으로 만들어져 있다.

무속신앙은 마을 공동체와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이다.
옛 사람들의 삶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기우의례와 치병의례는 한국의 전통풍습이며 고유의 민속이다. 민속을 통하여 일상생활을 엿볼수 있으며 그동안 잊혀져 지내왔던 의례와 동양신화는 신과 인간, 자연을 하나로 이어주는 창조적이며 순종적인 상호 형성관계이다.

흔히 건축을 시대별로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는 그릇에 비유한 것은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수천년의 세월속에 전통으로 내려오는 민속문화를 알려면 먼저 한국민속 문화의 뿌리인 무속(巫俗)신앙을 알아야 한다.

원시종교라 할 만큼 긴 종교로 불린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무속신앙은 고조선에 이르러 우리 민족과 함께 전해오면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견고히 뿌리 내려졌고 시대마다 다른 의미를 지닌 종교이자 문화였다.

삼국시대 유교·불교·도교가 수립된 이래 이들과 함께 공존했지만 성리학이 존엄했던 조선시대에는 억압과 천대를 받았다. 그러한 핍박속에서도 무(巫)는 존재했고 민중들의 신앙으로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무속신앙이 이렇게 우리 가까이에 내려 올수 있었든 것은 민중 가까이에서 어려운 현실을 극복 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서낭당과 성황당은 어떻게 다른가?”

산고개를 넘어 갈 때나 마을의 고개를 넘어가면 언덕배기에 돌무덤이 쌓여 있는 돌탑을 볼 수 있다. 소원을 기원하며 하나 둘 돌탑을 쌓기 시작한 돌들은 돌산을 이루고 있고 마을을 지키는 신목(神木)이나 마을입구에 장승이 세워져 있는 곳을 서낭당이라고도 하고 성황당(城隍堂) 이라고도 한다.

서낭당은 마을의 수호신 이자 길안내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데 이런 것을 우리는 서낭당이라 부른다.
소설가 정비석이 쓴 성황당은 1937년에 쓴 소설이다. 서낭당과 정비석이 쓴 내용의 성황당은 용도가 비숫한 것 같은데 왜 틀리게 쓰이는지는 성황당(城隍堂)은 한문으로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의미에서 서낭당은 토속적이고 민족적인 우리말이며 성황당은 한문으로 천년전에 중국에서 수입된 말이므로 한문이냐 한글이냐 하는것은 표면적인 말이다.

성황당의 수입된 역사는 거의 천년 정도 육박하고 있다. 고려시기때 중국의 성황당이라는 말이 고려로 직수입 되었다.

중국은 예로부터 성(城)을 만들면 반드시 해자(垓字)를 파는데 그이유는 왜적이 못 들어오게 하는 방어이다. 다리를 놓았다가 외적이 쳐들어 오면 다리를 걷어 올리는데 삼국지에서 많이 보았던 그런 풍경이다. 다리를 건너가면 입구에 벽돌을 조그마하게 쌓은 아담한 기와집이 있는데 이것을 성황당(城隍堂) 이라 불렀다. 중국인들은 성황묘에 모신 관우 같은 전쟁의 신이 자신들의 성(城)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고 열심히 공을 들였다.

이러한 민속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져 오면서 전국관아에 성황묘(城隍廟)가 의무적으로 설치된 것이다.

반면에 서낭당이라고 하는 것은 민중 속에 고스란히 전해내려온 전래의 샤머니즘 같은 무속적인 풍습이다. 조선후기에는 국가적인 성황묘가 해체 되면서 성황당과 민중의 풍습인 서낭당이 서로 뒤섞여 함께 쓰이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서낭당과 성황당묘는 거의 비숫한 의미로 쓰여 지고 있지만 내용적인 면에서는 서낭당은 토속적이고 성황당은 수입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황당은 국가에서 안녕을 비는 국가적인 풍습 이었다는 것이라면 서낭당은 토속적이고 민족적인 우리말로서 무속신앙을 대변하는 풍습이었다.

그런데 돌무더기의 돌은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생명을 보호 하는 수단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주 먼 옛날에는 산짐승들이 많아서 길가는 나그네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첩첩 산골에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짐승들을 만나면 돌을 가지고 짐승들을 쫓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사람을 위하여 돌을 하나씩 얹어 놓고 가는 것은 타인을 위한 배려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전승된 풍습이다.

“나무중에 으뜸인 소나무”

위천의 발원지인 고로면 학암리 마을을 안온하게 감싸주며 고고한 자태를 500년이 넘는 긴 세월 속에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신비의 소나무가 있다.

100대 민족문화의 상징으로 식물로는 유일하게 소나무가 들어가 있다. 소나무는 왕릉주변이나 사찰주변 유생들이 공부하는 서원 주변에는 어김없이 소나무는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전 유홍준 문화재청장 제직 시 이방자 여사의 장례식 때 쓰고 남은 이른바 왕의 나무라 하는 황장목으로 만든 관을 공개 했었다. 조선시대 왕족들은 몸통속이 누런 황장목 소나무로 관(棺)을 만들었다.

이방자여사의 아들 이구의 장례식 때는 향나무 관을 사용 하고 이방자여사 때 쓰고 남아 있던 황장목관은 황실 박물관에 영구보관 한다고 문화관광부에서 독특한 발표를 했다.

소나무는 산에 올라야만 볼수 있을까? 우리는 생활속에서 소나무가 그려져 있는 만원권 지폐를 하루에도 수없이 만져 보지만 정작 소나무 4송에는 관심이 없다.

일월오봉도의 화면 양 끝에 소나무를 두그루씩 배치하고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와 달, 시원하게 내려 꽂는 폭포는 역사적 문화의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신석기시대에는 소나무가 배로 쓰였으며 1600~1700년 전에는 글자를 쓰는 목간으로 쓰이다가 6세기 말에는 생명의 나무로 무덤속에 벽화로 나타났으며 7세기 초에는 일본 교토에 있는 국보1호인 미륵보살반가상은 일본에는 없었던 적송(赤松)으로 제작되어 신라에서 만들어 갔거나 적송(赤松)을 신라에서 가져가서 불상을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솔거는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으며 9세기 말부터는 무덤가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물질적 유용성이 컸던 소나무는 고려시대부터 선박용으로 소나무를 활용 했다는 역사적 사료는 고려 제25대 충렬왕7년(1281)에 일본 정벌용으로 배를 건조 하고자 변산 부근 소나무를 가지고 조운선을 만들었다고 나와 있다.

옛날에는 무거운 짐을 싣도록 배 밑바닥을 평평하게 만들었는데 그 배가 조운선이었다.
우리고장의 학암 신비의 소나무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길래 현재도 하루에 수많은 사람들이 사연을 가지고 복을 비는 대상이 되어 꾸준한 사랑을 받을까!

한번쯤은 신비스런 소나무 아래 정좌하여 눈을 감아보자 바람이 불어와 나무 구멍마다 나오는 자연의 소리는 어떻게 들릴까?

장자 재물론의 남곽자기와 안성자유가 나누었던 자연의 이치가 무엇인지 학암리 신비의 소나무는 알고 있을 것 같다.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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