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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군위, 새로운 문화 도시 가꾼다

admin 기자 입력 2015.08.16 21:08 수정 2015.08.16 09:08

김영만 군수, 신도청과 대구의 가교역 잇점 “문화 창조 융합 벨트 육성”

지방지치 20년과 신도청시대 에 맞춰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군은 경북의 중심에서 새로운 문화도시를 가꾼다.

김영만 군수는 신도청과 대구의 가교역 잇점을 최대한 이용,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 문화 창조융합벨트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군위군청 홈페이지에는 첫 머리에 ‘삼국유사의 고장’으로 표기해놓고 있다. 고려 후기 고승 일연이 입적할 때까지 5년 동안 군위에 있는 인각사(麟角寺)에서 머물며 삼국유사(三國遺事) 집필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한국 최초의 정치공동체인 (고)조선의 근원을 가정 먼저 밝힌 고서다.

군위에는 한밤(大栗)마을과 깨끗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명소가 많다. 고로면 화북리 인각사 절터 건너편에는 학소대가 있다. 바위와 물, 소나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학소대는 예로부터 학이 깃들어 살았다고 해 이름이 붙여졌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 절벽이 신선이 사는 듯한 풍광을 자아내고 있다. 팔공산 자락을 뒤로 한 북향마을인 한밤마을의 부림홍씨 홍여하(洪汝何)가 저술한 한국의 ‘한(韓)’의 유래를 밝힌 ‘휘찬려사(彙纂麗史)’를 소장한 마을이다.

국보 제109호로 지정된 군위의 삼존석굴(부계면 남산리)은 493년(신라 소지왕)에 창건했다. 천장은 한가운데가 높고 사방주위는 차차 낮아지는 하늘의 모습을 띠고 있다.

팔공산에서 뻗은 바위산 천연동굴 속에 만들어진 이 석굴은 경주 석굴암보다 조성 연대가 250여년 앞선 높은 예술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석굴사원 가운데 유일하게 자연암벽 20m 높이 동굴 속에 있는 아미타불과 보살상은 신라 조각예술의 뛰어남을 보여준다.
효령면 장군리의 경북대 자연사박물관도 여행객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공룡화석, 지질 암석, 생명자원, 곤충과 야외에서 사육, 보호되고 있는 야생동물들도 구경할 수 있다. 철새탐조, 화석 탐사, 식물표본제작 등 다양한 체험학습도 할 수 있다. 국내 유일의 사과연구소도 있다.

산성면 화본리의 화본역도 볼만하다. 군위IC에서 30분 정도 거리다. 서울(청량리)에서 경주를 잇는 중앙선은 산이 많은 한반도 내륙에 만들어진 종단 철로다. 무궁화호 열차가 간간히 서는 간이역이다. 네티즌들에 의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예쁜 간이역’으로 선정됐다.

1936년 문을 연 이 역사(驛舍) 골조는 뾰족한 지붕의 일제강점기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근대문화유산이다. 부근에 폐교된 산성중학교 교정에 추억의 현대사 박물관이 있다. 50~70년대 생활 도구들을 진열했다. 아이들에겐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줄 수 있는 곳이다.

2014년 무소속으로 당선된 김영만 군위군수는 신도청과 대구의 가교지역으로서 잇점을 살려 명품전원 도시 건설을 추진 중이다. 산성면 임산물 산업화 지원단지, 의흥면 삼국유사 가온누리, 군위금성로에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나눔공원 조성 등을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 군위에서 초등학교(공립보통학교) 시절 살던 집은 새롭게 단장했다.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때인 1280년대 보각국사라 불리는 승려 일연이 편찬했다.
유사(遺事)는 전해지는 이야기, 즉 전설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김부식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정사(正史) ‘삼국사기’보다 140년 뒤다.

삼국유사의 역사적 사실성은 완벽하지 않다. 일연이 세상 떠난 지 6년 뒤 부도비가 세워질 때 당대의 학자 민지(閔漬)가 지은 비문에는 일연 승려가 쓴 ‘게송잡저(偈頌雜著)’등 100여권의 불서(佛書)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유사’는 언급하지 않고 않다. 이것은 “삼국유사를 심심소일로 희작(戱作)한, 확인될 수 없는 일사유문(逸事遺文)으로 여겨 고의로 넣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한 사학자의 지적이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꺼져가는 촛불처럼 나라가 위태로운 구한국과 일제 강점기에 다시 빛을 발했다. 육당 최남선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야사(野史) 중심의 ‘삼국유사’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풍부하다. 설화와 신화의 보고(寶庫)다.
정사(正史)인 진수의 ‘삼국지’와 이를 토대로 소설화한 명말 청초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 비견된다.
서양의 ‘구약성서’에는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한 출애굽 기적이 있지만 이 삼국유사에는 주몽이 부여를 탈출해 엄수(현 만주 백하)를 건너 고구려를 세운 이야기가 있다. 또 ‘삼국유사’에는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이야기, 처용의 아내가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운 이야기 등 향가와 상고가요 17수를 소개하고, 배경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불교가 통치이데올로기였던 고려의 국사(國師)였던 일연(1206∼1289)승려는 경산에서 태어났다. 달성군 비슬산 대견사와 청도군 용연사에서도 머물렀다. 일연은 당대의 시인 이승휴로부터 ‘선문(禪門)의 운사(韻士)’라는 칭호도 받았다. 산중의 시인이라는 말이다.

무신정권과 원(몽골)이 온 나라를 집어삼켰던 난세에 충렬왕은 일연을 국사에 임명한다. 난파하는 배에 올라타 선주에게 코치도하고 컨설팅도 해야하는 게 국사 일 것이다.
망해가는 듯한 나라에서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단군조선을 강조한 게 아닌가 싶다. 동시대에 단군조선 이야기가 있는 이승휴의 제왕운기도 그런 배경이다.

고승 일연이 꼽은 여섯 도둑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온다. “보이는 대로 다 가지려는 눈,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는 귀, 좋은 냄새만 맡으려는 코, 갖은 거짓말에 맛있는 음식만 먹으려는 혀, 훔치고 못된 짓만 골라 하려는 몸뚱이가 그 다섯이다. 끝으로, 이놈은 싫다 저놈은 쫓아내야 한다거나 저 혼자 화내고 떠들고 소란피우는 생각도둑이다” 8백 년 전에 ‘일연 육적(六賊)’의 교훈은 오늘날에도 꼭 같이 적용되는 현실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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