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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핏줄의 신비, 뿌리

admin 기자 입력 2015.08.24 15:30 수정 2015.08.24 03:30

지난 5월 마지막 토요일 종친회총회를 다녀왔다. 서울 세종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전국 황씨 중앙종친회 참석을 위해서다. 나는 부산종친회를 대표하여 여러 임원들을 대동하여 새벽 4시 관광버스로 부산을 출발 오전 10시경 행사장에 도착했다.

각 광역시별, 각도별 종친회에서 온 시조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본관이나 종파에 관계없이 큰 행사장을 꽉 매웠다. 조상의 유풍과 위업을 함양 계승하고, 족보의 순수성과 존엄성을 유지하여 문중의 영광을 영구히 보존토록 결속하는 한마당 행사였다.

피로 끈끈하게 연결된 종친회가 일가끼리 모이는 것은 혈연을 더욱 다짐하기 위함이다. 혈육의 뿌리를 알고, 핏줄을 이어받은 가문을 숭상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성정이 아니겠나.

중앙종친회 행사 때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문중일가가 구름같이 모여든다. 족벌의 확인, 혈육이 좋기도 하고 참 든든하다. 어느 성씨의 문중이든 정을 주고받는 느낌은 같을 것이다.

사십년 전 알렉스 헤일리가 쓴 소설 <뿌리>가 떠오른다. 혈육 찾기에 선풍을 일으킨 작품이다. 아프리카의 흑인소년 쿤타퀸테가 미국으로 끌려가 이름마저 잃고 비참한 노예의 삶이 시작된다. 그러던 그의 후손들이 뱃길로 왔던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가 이백 년 만에 조상의 뿌리를 찾아 고향사람들과 해후하던 장면에 눈시울 적시던 그때가 새삼 생각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걸 느낀다.

어디 인간세상만 그렀겠냐. 가족 사랑으로 유명한 동물, 코끼리도 그렇다. 코끼리 중 누군가 위험에 빠지면 떼로 달려가 구출을 위한 필사의 노력을 다 한다. 그러다 한 마리가 죽으면 하나 둘씩 모여 마치 조의를 표하듯 그 주변을 빙 둘러서서 애도의식을 치른다고 한다.

또 킹펭귄은 알을 낳아 두발위에 올려놓고 피부로 감싸 안으며 어디로 굴러갈지, 차가운 바닥에 떨어질지, 적에게 공격당하지는 않을지 무려 두 달 동안 애지중지 품는다고 한다.

연어 또한 불가사이 한 일생을 마친다.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는 회기본능이 있다. 머나먼 물길 속을 폭포와 급류를 거슬러 오르다 곰 같은 천적들에 위협을 무릅쓰고 고향을 찾는다. 고향에 와서 후손의 번식을 위해 알을 낳고 자신이 낳은 알의 주변을 맴돌며 외부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강한 모성애를 발휘한다. 산란이 끝나면 지쳐 숨을 거둔다. 종족을 잇는 숙명, 눈물겨운 번식이다.

한국과 중국은 유교적인 전통문화의 역사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이다. 왕조 시대의 유물, 버려야할 낡은 유산으로 인식되어왔던 유교사상이 지금도 여전히 맥을 이어가고 있다.

미래학자 짐 데이트 하와이대 교수는 “미래사회에 인류가 갖춰야할 윤리는 미래시대의 나침판이 될 삼강오륜이다”라고 강조했다. 유교의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 도리를 말하고 있다. 나는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리 중 부모는 자식에 인자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존경과 섬김을 다 한다는 부자유친을 으뜸으로 생각한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문중이 있고, 지방마다 명문대가가 후손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고려 초기에서 중엽 이후에 나타난 본관은 옛 조상이 살았던 본거지를 중심으로 같은 피를 나눈 혈육집단의 일원으로 형성되었다고 여겨진다.

또 족보는 집단적 가계 혈통을 통해 가문의 정체성을 삼십년 단위로 세손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도 강하게 남아 있는 문벌의식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현재의 고단한 삶을 버티게 하는 자존심의 근거이기도하고 위안도 될 수 있다. 본관을 따지는 것은 스스로가 양반이라는 인식과 조상의 고귀한 혈통을 내 새우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모든 가문은 혈연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흔히들 결백을 주장하거나 다짐을 할 때 “차라리 내 성을 갈겠다”고 하는 것은 임금에게 하사받은 성이였거나, 고관대작들만 사용하던 귀한 성씨에 대한 자부심으로 절대 바꾸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일 수도 있다. 특히 개인의 이름 석 자는 자기의 존엄과 명예의 상징으로 여긴다.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처럼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 인격과 명예를 통칭하는 부호다. 옛 선비들은 그 이름을 보존하는데 목숨을 걸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사람됨을 가늠하는 정체가 된다. 살아생전에 자칫 잘못하면 죽어서도 더러운 이름이 오랜 세월동안 자손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이럴진대 내 인생이라고 내 마음대로 어찌 함부로 살아갈 수 있으랴.

지금도 성씨마다 문중에 대한 집착과 열성은 식지 않고 여전히 왕성하다. 조선 고종 때 갑오개혁으로 양반제도가 폐지되었으나 은연중에 양반문중의 자궁심이 남은 것 같다. 가문의 예절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인사를 주고받을 때 성씨와 관향을 가끔 묻기도 하고 물음을 당할 때도 있다. 옛것이 지켜지고 살아지질 않아 다행으로 여긴다.

또 우리사회는 어른 이름을 함자라 하여 이름을 높여 주는 예의도 잃지 않았다. 자네 춘부장의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가? 라고 묻는 어엿함은 언어의 절제된 품격이다. 문화적으로, 교육적으로 얼마나 소중한 전통예절인가! 이 시대에 사는 한국인은 모두가 양반의 후손이고, 명문가의 자손 됨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자부심 뿌듯하게 살고 있다.

황성창 시인/수필가(부산광역시 황씨 부산종친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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