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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1)

admin 기자 입력 2015.08.26 12:19 수정 2015.08.26 12:19

ⓒ N군위신문
군위군청 청사 앞 화단에 대원군의 척화비가 세워져 있다. 아마도 본래의 비석자리가 아닌 군청 청사가 지어지고 척화비를 현재의 자리로 옮겼으리라 짐작해 본다. 척화비라고 알리는 안내표지석이 없으니 유적을 코앞에 두고도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는다면 알 길이 없어 아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역사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지나간 현재이며 모든 역사에는 현장이 있기 마련이다.
척화비가 언제 어디에 어떻게 세워져 있었던 것을 언제 어느 시기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는 안내문이라도 있다면 그 또한 역사의 현장이 되는 것이다.

1871년에 세워져 현재까지 14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비석의 글자는 마모되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 금석문의 가치를 온전히 지니고 있어서 그나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지금의 우리나라 동북아 정세와 미국과 중국과의 묘한 줄다리기 속에 양나라와의 외교관계, 일본과는 끊임없는 독도분쟁과 정신대할머니에 대하여 진정성 있는 사과요구에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일본과의 불편한 관계, 늘 머리위에 핵을 얹고 있는 것과 같은 북한과의 대치는 대원군의 초기 집권기의 혼란이 내제된 시점과 비슷하여 척화비를 세우게 된 원인과 배경·역사적 사건들을 시기별로 나열하여 소개해 보고자 한다.

먼저 흥선대원군은 1871신미년에 전국의 도로 등지에 3000여개의 척화비를 세우고 개방이 아닌 쇄국을 택했다.

비석에 세긴 척화비의 글을 보면 내용은 이러하다.
원문: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왔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즉,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우리들 자손만대에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고 글자를 새겼다.
위내용을 보면 간단하지만 굳은 신념과 의지가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1863년을 전후한 19세기 중반 세계정세와 한반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병인박해가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연이어 프랑스와 조선의 전쟁인 병인양요와 미국제너럴셔먼호상선 사건, 남연군 분묘사건, 신미양요로 이어져 조선을 개항 시키려는 서구 열강들과의 갈등은 대원군의 집권초반 불안정한 국내정치 환경과 대외환경이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고장의 추기경 생가 안내문에 김수환 추기경의 조부이신 김요한公이 병인박해로 순교를 당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병인박해의 원인은 러시아 남하정책으로 세세동점(西勢東漸)이라 하여 서양세력이 동쪽으로 밀려오는데 조선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나라가 바로 러시아 이다.

러시아의 존재가 들어 난 것은 2차 아편전쟁 때 영국은 프랑스를 끌어들여 청나라를 반식민지로 만들고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면서 아편전쟁은 끝이 난다.

청나라 함풍제는 구사일생으로 자금성으로 돌아와 러시아 때문에 목숨이라도 건진 게 어디냐며 싸움을 말려주어 고맙다고 러시아에게 연해주를 할양 해 준다.

러시아는 꿈에도 그리던 얼지 않는 항구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를 가지게 되었는데 웬걸 겨울에는 얼어 버리는 반쪽짜리였다.

그러자 1861년 러시아는 다시 일본 대마도를 점령해 버리자 일본은 큰 충격에 빠진다.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당한 꼴이었을 때 세계 최대 강국이었던 영국이 끼어들어 큰 기침 한번에 러시아는 대마도를 철수 하지만 일본은 이때부터 1904년 러일전쟁때 까지 러시아에 대한 공포증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공포증은 일본이 급속한 군비확충을 하는 촉매제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러시아가 연해주를 청나라로부터 활양 받은 것은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불편한 것이 희한하게 생긴 신종 오랑캐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이때부터 일본 못지않게 러시아라는 서양 오랑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 외항선들이 수시로 조선 앞바다에 출몰 하였고 서양난리가 난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민가에 떠돌았으며 서양난리가 나면 불바다가 되는데 목에 십자가를 걸고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풍문까지 돌았다.

이런 어수선한 정국에 1863년 고종이 12살의 나이로 26대 조선국왕으로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의 국경도시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정부에 가부를 결정해서 답변을 달라고 날짜까지 지정해 요구를 한다.

갓 집권한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대신들은 당황했고 대책마련에 부산을 떨지만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했다.

이때 천주교 신자들이 해법을 제시 하는데 그 내용을 보니 지금 조선에 프랑스 신부 12명이 들어와 있는데 프랑스 신부들이 본국의 나폴레옹3세 한테 이야기 하면 나폴레옹3세가 요즘 영국과 친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러시아 근해에 영국을 끌어 들여서 조선‧프랑스‧영국 이렇게 조불영3국 동맹을 맺어서 러시아 침략을 견제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흥선대원군은 솔깃해진다.
그래서 흥선 대원군은 조불영3국 동맹을 선교사들에게 추진하라고 하면서 허락을 한다. 사실 흥선대원군은 집권초기 동학은 탄압을 해도 천주교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 했다.
고종의 유모인 박마르트와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대부인 민씨도 천주교 신자였다. 고종이 즉위 했을 때 감사미사를 드렸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천주교에 관대했던 대원군에게 러시아의 침략보다 더한 위기가 찾아온다.
조불영3국 동맹 추진은 지연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천주쟁이들이 궁궐을 무단출입을 한다는 소문이 났다.

외세의 위협보다 더한 국내적 위기에 몰린 대원군은 이천주쟁이들을 빠짐없이 치도(治盜) 하라는 조대비의 전교를 받아들인다.

조대비의 전교를 받아들인 흥선대원군은 조선에 와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을 잡아들이며 조선 천지를 피로 물들이는 아주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당시 조선에는 프랑스 선교사가 12명이 있었는데 그중 9명이 목이 잘리는 국문효수(鞠問梟首)를 당한다.

그리고 일반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오가작동법이 시행 되었는데 오가작동법은 5가구를 하나로 묶어서 그중 한집만 걸려도 나머지 4집이 같이 엮이어 가는 것으로서 무고한 백성들까지도 강풍처럼 몰아치는 칼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이 박해를 병인년(1866)에 일어났다고 해서 병인박해라 하며 병인박해때 8천여 명 많게는 더 이상의 백성들이 천주교 신자로 몰려 희생되었다고 추정한다.

처형장은 새남터 였는데 조선시대 중죄인들의 처형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새남터에서 성삼문등 사육신이 처형되었고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도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이 병인박해는 서양의 천주교 역사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조선을 순교의 땅으로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박해였으며 이 병인박해는 대외관계에서 흥선대원군이 쇄국의 강을 건넜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

다음호에는 프랑스군인이 일으킨 병인양요와 미국제너럴서먼호의 대동강 출현에 대한 이야기를 실어드리겠습니다.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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