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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미옥 해설사 |
ⓒ N군위신문 |
지난호 병인박해 이야기에 이어 병인양요는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 하였으니 조선인 9천명으로써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며 조선 국왕이 프랑스 신부를 잔인하게 살해한 날이 조선국왕 최후의 날이 될 것이다 라고 하면서 1866년 9월에 프랑스군은 군함 3척을 보내어 한양의 양화진까지 올라 와서 지세와 수로를 탐사한 후 지도 3장을 만들어 정찰만 하고 텐진으로 돌아 갔다.
프랑스 군함은 같은 해 10월 7척의 군함에 1200명이상의 해병대 병력을 태우고 리델신부와 조선인 신도 3명의 길안내로 강화부를 공격 점령하고 한강을 봉쇄하여 신부들을 살해한 책임자를 엄벌하고 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 하지만 조선 정부는 선교사들이 국법을 어긴 것이지 프랑스 정부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은 아니다라고 전했지만 프랑스군은 받아 들이지 않았다.
병인양요의 격전지가 된 강화도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서구제국주의의 침략세력과 조선과의 전투로서 강화도에서 벌어진 문수산성(文殊山城) 전투와 정족산성(鼎足山城)전투가 있다.
음력 10월 26일 문수산성 한성근 부대의 항전으로 프랑스 군대는 27명 사상자를 낸다.
또한 정족산성은 양현수 장군이 프랑스군대를 괘멸시켰던 장소 이기도 한데 정족산성을 다른 말로 삼랑성(三郞城)이라고도 부른다.
그 이유는 정족산에 3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단군의 아들 3명이 각각 한 봉우리를 맡아서 토성을 쌓았는데 사내 랑(郞)자를 써서 삼랑성(三郞城)이라 한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삼국시대 형식으로 고려시대때 증수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가 얼마나 치열한 격전지 였는가 하면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완전 점령을 하였을 때 대원군의 명령을 받은 양현수의 작전은 화력면에서 절대 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제압하는데는 기병작전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여 강화해협을 도하한 양현수 장군은 병사들을 이끌고 은밀히 침투를 하였다.
프랑스 군은 근대식 무기로 우세하여 평지에서 싸우면 패배할 것을 알고 양현수장군은 꾀를 내었다.
프랑스군대가 방심을 하고 정족산성을 비워두었을 때 양현수 장군은 군사들을 이끌고 우회를 해서 은밀히 산성안으로 들어가서 성문을 닫아 버리고 적군을 유인하여 프랑스군을 상대로 6명 사망, 30명 부상의 피해를 주었으며 아군은 적은수의 사상자를 내면서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에 프랑스 사기가 크게 꺾였으며 조선침공의 무모함과 교전이 불리함을 깨달은 로즈제독은 음력 11월11일 프랑스군은 40여일간 점령했던 강화성에서 퇴각하면서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 의궤를 비롯한 340여책의 문서를 약탈하고 5000여권 이상의 책을 보관한 전각을 불태웠다.
규장각은 역대왕들의 주요 기록물들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정조는 규장각의 기록물들을 너무너무 소중하게 생각하여 이규장각의 보물들을 보다 안전하게 보관할수 있는 방법이 없을가 생각하여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만들어 보관했던 것이다.
몽골이 고려를 침략 했을 적에도 강화도에서 끈질기에 버티었으며 서적, 지도 등 국보급 보물들을 강화도에 보관하였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견습사관 주베는 강화도의 한 촌락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의 집 방안에도 책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유럽에서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직접 모든 글자를 써서 책을 만들어야 했으며 기존의 책을 손으로 필사하여 새로운 책을 만드는 전문가인 필경사가 활약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의 촌락인 양민의 집에서 책이 가득한 방안을 목격 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병인양요의 원인은 1866년 고종3년에 대원군의 천주교 금압령에 의해 수천명의 천주교인과 프랑스선교사를 학살 한것에 대한 보복을 위해 프랑스군이 침략한 사건이며 이로인해 1866년10월16일 강화부가 점령되어 양민 학살과 수많은 보물들을 약탈당하고 전각들은 불에 타서 소중한 문화재를 빼앗겨 버리고 잃어버리는 댓가를 치루어야 했던 사건이다.
다음의 이야기는 쇄국을 강화 하게한 일대 사건중의 하나가 바로 미국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 출현한 사건이다.
박규수는 평양감사에 부임된지 몇 달 되지 않아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평양감사였던 박규수는 열하일기로 유명한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로서 연암 박지원의 영향을 받아 우리 근대사에 통상 개화파로 분류되는 대표인물이 박규수이다.
병인박해로 어수선한 정국에 서양함선이 나타나니 당황스러웠던 박규수는 제너럴셔먼호에 사람을 보내어 조선에 온 목적을 물어본다.
제너럴선원들이 통상을 하자는 제안에 조선의 국부가 서양의 통상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딱 잘라 거절을 한다.
그런데 이 선원들은 대동강을 어슬렁거리며 돌아가지 않더니 급기야 제너럴셔먼호에 평양민들이 포로로 잡히는 사태까지 일어나자 평먕민들이 대동강변으로 몰려 들었다.
제너럴선원들은 평양관민들에게 소총과 대포로 마구 쏘았으며 피해가 속출했다.
화가난 평양관민들은 밀물을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썰물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는 제너럴셔먼호에 평양감사 박규수가 고깃배 수백척을 모아 땔감을 가득 싣고 셔먼호를 애워싸서 불을 지르고 침몰 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때 셔먼호에 있던 선원 13명은 불에 타서 죽고 물에 빠져 죽고 탈출한 사람들은 목이 잘려서 효수를 당했다.
바로 1866년 고종3년 8월 15일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미국상선이 통상을 하려면 한양으로 가야 하는데 왜 평양으로 왔을까?
그때 조선은 은둔의 나라로 몇 안되는 정보들이 서양 탐험가들 사이에 풍문으로 떠돌고 있었는데 그 풍문중 하나가 조선은 황금과 보물이 엄청 많다는 소문이 났었다.
조선에서 가장 보물이 많이 있는 곳이 무덤이다라는 소문까지 돌았는데 그 이유는 만주벌판을 호령했던 고구려왕 주몽인 동명성왕의 무덤과 고구려 수도가 평양으로서 다른 왕들의 무덤도 많이 있다고 믿었으며 그곳에는 보물들이 가득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소문의 출처는 조선에는 한번도 와 본적 없는 프랑스 선교사가 조선은 황금의 나라라고 만든 책이었다
청나라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하여 서양에 소개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병인박해를 구실삼아 침략야욕을 일으킨 로즈제독이나 통상을 요구하며 평양에 나타났던 미국 제너럴셔먼호나 이 모두가 조선은 모피나 종이가 우수하고 유약이 발달된 도자기의 아름다움과 금이 풍부한 조선이라고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보를 들은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 하는 사건을 일이키고 1871년 신미양요까지 일어나게 되자 대원군은 쇄국의 문을 더욱 닫아 버리는 계기가 되고 만다.
성리학의 이념인 유교국가에서 조상의 묘를 서양인들이 도굴하는 사건은 분노를 일으킬 만 한 사건이다. 대원군은 2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 )라는 것 때문에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기도 했었다.
위의 이야기는 다음호에 실어 드리겠습니다.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