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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3)

admin 기자 입력 2015.10.04 14:34 수정 2015.10.16 02:34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효를 인간의 도리를 다 하는 인(仁)의 한 방편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기어 돌아가신 부모나 선조를 보본추원(報本追遠) 하는 방법으로 부모나 선조에 대한 제사나 분묘(墳墓)가 있는 묘역은 조상을 모시는 신성한 곳으로 항상 잘 가꾸며 정성을 치성하는 곳이다.

그런데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이어 1868년 독일상인이자 학자인 에르스트 오페르트가 조선과 두 번의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 당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 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덕산굴총(德山掘塚)이라고도 하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남연군의 분묘가 있는데 처음부터 충남 덕산면에 있었던게 아니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묘를 1846년 이장을 하게 된다.

왜 대원군은 아버지 묘를 이장 했을까?
여기에는 세도정치의 실상과 연관성이 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어린 나이에 왕으로 즉위 하면서 몇몇 가문이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후 권력을 독점하고 비정상적인 정치를 하는데 이를 세도정치(勢道政治)라 한다.

순조이후 60년간 세도정치가 이루어졌으며 순조는 11세에 즉위하여 안동김씨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으로 권력을 장악 하였고 헌종은 8세에 즉위하여 풍양조씨 조만영이 헌종의 외조부로 권력을 장악 하였으며 철종은 19세에 즉위하자 장인이었던 안동김씨 김문근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여 세도정치가 판을 치게 되었다.

왕은 허수아비 같은 존재로서 정치권력은 세도가가 독점하고 심지어 왕의 가까운 친척이라도 세도가의 권력에 짓눌러야 했으며 똑똑한 왕족들을 보면 이런저런 역모를 엮어 다 죽여 버렸다.

세도가를 비판하는 세력은 살아 남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양반 가문은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이하응 또한 파락호(破落戶)생활을 하면서 안동김씨의 눈을 피하며 놀림감으로 자청하였다. 이런 세도정치에 의해 정치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왕족들이 수난을 당할 때 흥선군 이하응의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를 듣게 된다.
당대 풍수가였던 정만인이 말하길 좌청룡 우백호가 크게 좌우로 뻗어 2대천자지지 즉 2대에 걸쳐 왕이 나온다는 명당 자리가 있다는 거다.

그런데 그 명당 자리는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가야사는 암자가 99칸이나 되는 쾌나 큰 절이었다.
흥선군은 가야사를 불질러 버리고 탑이 있던 자리에 자신의 부친 남연군의 무덤을 만들었다.

자신의 바람대로 둘째아들 이명복이 고종으로 그의 손자는 순종으로 2대에 걸쳐 왕이 나오지만 아쉽게도 2대 후에는 망국의 길을 가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의 주범으로 남연군의 무덤을 파보니 곡갱이가 들어가질 않는다. 석회로 밀봉을 해 놓았기 때문에 도굴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오패르트가 도굴을 실패하고 조선을 무사히 빠져 나가도록 도움을 준게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오페르트 남연군 분묘사건은 조선에서 더욱더 가혹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고 쇄국정책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원군이 쇄국으로 조선의 문을 더욱 잠글때 미국은 다시 조선의 문을 두더린다.

1871년 일본 나가사키에 정박 중이던 미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로 쳐들어 오는데 이게 신미양요이다.

1866년 병인양요가 있은지 5년 만이다.
미국 아시아함대는 군함5척과 병력800명을 태우고 와서는 “조선 너네들이 5년전에 평양 대동강에서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으니 어서 우리에게 사과하고 통상을 맺자”고 하였다 최종목적은 병력을 과시하여 조선과 수교협상을 맺는 일이다.

대원군이 일언지하 거절을 하자 미국은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판단한 후 조선과의 일전을 앞두고 특별히 해상기동훈련까지 실시하고 남북전쟁에 참여했던 정예군도 있었다.

미국 함대는 최강의 무기를 앞세우고 해상에서는 함포로 육상에서는 야포로 강화도를 공격한다.
덕진진과 초지진을 거쳐서 광성보를 공격하는 미군함대를 상대로 광성보의 어재연장군이 이끄는 조선군민은 접근이 쉽지 않은 절벽 요세 위에서 조선군은 선체로 재장진 1분에 1발을 쏘는 조선의 화승총이었고 미국은 엎드린 자세로 1분에 10발 이상을 쏠수 있는 레밍턴 소총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조선의 수비병은 조총을 재장전 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요새로 올라오는 미군을 육탄으로 방어했다는 미해군 슬라이 소령의 회고록 내용을 보면 조선군은 미국을 상대로 얼마나 힘겨운 전투를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 그들은 대단히 용감했고 두려움 없이 성벽위로 상체를 노출시킨채 사격을 가해왔다며 미해병 대위 맥글레인 틸튼의 작전 보고서 중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무기의 열세를 이기지 못한 조선군은 사망자 350명과 전투의 주역인 어재연장군과 동생 어재순 형제가 장렬히 전사 하였다.
조선군 사망자 350명 미군 사망자 3명 그런데 전쟁결과에 대한 양측의 상반된 평가는 미국은 압승을 거둔후 유리한 수교협상을 기대했던 미국과 영토를 잃지 않았으니 패배가 아니라는 조선의 인식이다.

조선군 총대장 어재연의 깃발만 갖고 철수한 미국은 승리는 하였다고 하나 누구 한사람 기억하고 싶지 않는 무의미한 승리였다고 평을 하였다.

병인양요와 오페르트사건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서양세력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고 서양세력 침입을 물리 칠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자 서양과의 통상수교를 철저히 거부하는 정책을 펴게 되었다.

이러한 통상수교 거부정책은 서양문물을 받아 들이는 시기를 늦어지게 하였지만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자주적인 선택을 한 것이 쇄국정책이다.
쇄국정책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종로와 도회지 전국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던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이야기는 미국은 조선과의 전쟁 승리의 전리품 이라며 조선군 총대장 어재연(魚在淵)장군이 사용했던 깃발을 미해군이 탈취해 갔는데 일명 수자기(帥字旗)라고도 한다.

수자기(帥字旗)를 미군함에 걸어 두고 기념 사진을 찍었는데 미해병대위 맥글레인 틸튼은 광어를 들고 있는 희귀한 사진이 있다.
한달 넘게 조선에 와있던 미해병대위 맥글레인 틸튼은 광어회 맛을 알고 마니아가 되었다고 한다.
신미양요때 광어회 맛이 미국에 전해져서 지금도 미국에서는 대한민국 광어회는 최고로 인정해 준다고 한다.
사진을 찍어면서 온통 머릿속에는 아마 이 광어 사시미 회를 뜨 먹을 생각밖에 없었을 것이다.

1871년 신미양요때 가지고 갔던 수자기(帥字旗)는 미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2008년 137년 만에 10년 장기대여로 지금은 강화역사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다.
중국도 손을 들었던 프랑스와 일본도 굴복하여 개항을 하였던 미국을 상대로 조선은 큰 희생이 따랐지만 자주적으로 물리쳤다고 조선은 의미를 두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척화비를 세우게 된 내용을 안다면 당대의 사회적 상황과 역사를 확인 할수 있는 좋은 자료다.
이제 군위군에서는 군청 화단에 있는 척화비를 본래의 자리인 사라온마을 역사테마공원으로 옮길 예정에 있다.

역사란 앞 세대의 업적을 수용하되 새로운 세상을 어떻게 열 것인가를 공부하는 것이다.
144년의 세월이 흘러도 분실되거나 마모되지 않고 보존이 잘 되어 있어서 유물유적의 가치가 높은 만큼 역사를 바르게 알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할 것이다.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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