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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계방산―설국 그 품에 들다

admin 기자 입력 2015.12.20 22:29 수정 2015.12.20 10:29

↑↑ 김기탁 씨
ⓒ N군위신문
계방산(1,577m)은 겨울철이면 순백의 세계로 변한다.
남한 내륙에서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에 이어 다섯 손가락에 드는 고봉답게 하늘을 뚫을 듯 우뚝 솟구친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봉우리 전체가 마치 거대한 하나의 눈꽃 같다. 길게 뻗은 굵은 산등성이는 멀리서도 눈부실 만큼 반짝이는 설능을 이룬다. 환상적인 풍광을 자아내는 설경과 조망을 기대하며 저물어가는 을미년 십이월에 계방산 깊은 품으로 접어든다.

산행의 기점은 운두령 정상. 눈과 바람이 많은 곳이라 단단히 무장하고 아이젠을 신는다. 가파른 계단을 조금 오르자 이내 완만한 길이다.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는 소리가 정겹다. 산 아래 깊이 파인 계곡은 긴 겨울잠에 빠져 있다. 나무와 바위들은 눈옷을 입고 계곡은 얼음에 덮인 채 숨을 죽인다.

능선에 접어들자 칼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친다. 매서운 바람은 능선을 따라 고혹적인 상고대를 연출한다. 나뭇가지마다 영롱하게 매달린 얼음 꽃들, 봄의 꽃인들 이보다 더 고울 수 있을까. 투명한 빙화와 코발트빛 하늘의 매혹적인 조합에 추위마저도 잊는다. 이처럼 운치가 빼어난 겨울 산을 소수만 즐긴다는 점이 아쉽다.

다시 산길을 오른다. 적잖이 급한 길은 깔딱고개라는 별칭에 걸맞게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거워오는 다리를 옮겨 놓으며 인내하는 스스로를 대견해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겨울산은 하루에도 열두 번 그 모습을 달리 한다. 아침 해가 안개를 몰아내면 순백의 설원이 펼쳐진다.

눈 덮인 나뭇가지들이 만든 눈 터널은 겨울 산행의 백미다. 초여름 한철 연분홍빛으로 화사하던 철쭉군락은 눈꽃으로 반짝이고, 푸른 가지 늘어뜨린 솔들은 하얀 함박꽃을 피웠다.

방한복을 파고들던 칼바람은 이제야 좀 잠잠해졌다. 지금 시각 오후 두시 서둘러 도시락을 꺼낸다. 추위에 입이 얼어붙어 밥 넘기기도 쉽쟎다. 계방산 설국 품에 안겨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입에 머금고 그 맛을 음미 하면서 보는 생생한 백설의 동양화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한다.

전망대의 조망은 환상적이라는 말로밖엔 표현할 길이 없다. 북쪽의 설악산과 동쪽의 오대산이 하얀 솜이불을 덮어쓰고 장쾌한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멀리 방태산과 전봉산의 주봉이 꿈틀거리며 눈앞으로 다가온다. 산허리 부근부터 휘감아 오른 상고대는 눈부시듯 아름답다. 어느 진경산수화가 이보다 좋으랴. 두고 두고 잊지 못할 영상으로 남는다. 시간을 아껴 다시 산길을 재촉한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고되다. 매서운 한파에 손끝이 얼어 오고, 얼굴은 깨져나갈 듯하다. 콧구멍 속의 코털도 쩍쩍 달라 붙는다.

찬 날씨에도 오손 도손 이야기꽃을 피우는 회원들의 모습이 소박하고 정감이 넘친다. 한겨울 눈 산행이 왜 힘들지 않을까마는 그래도 얼굴빛은 밝다. 순간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을 나게 하는 오르막 빙판길은 속도가 붙지 않는다.

미끄러지고 다시 오르기를 이십 분 남짓, 마침내 정상에 닿는다. 추위에 얼어 붙은 표지석이 일행을 반긴다. 정상에 우뚝 서니 주위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 찬다.
설악산 대청봉 능선을 따라 중청과 귀때기청까지 흰 눈을 얹은 채 솟구쳐 오른다. 또한 강원도의 크고 작은 산들이 너울을 이루며 조망을 보탠다.

눈 덮인 설원은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구름인지 분간이 어렵다. 그저 한폭의 수목화만 펼쳐질 뿐이다.

을미년 한해를 마무리 하는 마지막 종착역인 십이월, 계방산 정상에서 태양을 바라본다. 장엄하고도 따사로운 햇살이 천지간에 가득하다. 그 햇살을 한 자락만 가슴에 쓸어 담아도 새해의 꿈과 소망을 모두 이룰 수 있는 희망과 용기가 샘솟을 것만 같다. 새해에도 우리 굴렁쇠 산악회가 말 그대로 쉼 없이 잘 굴러 가길 소망한다.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바람에 입을 막으며 하산을 서두른다. 내리막길은 누가 뒤에서 밀어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미끄러져 내린다. 나뭇가지엔 전국 산악단체가 달아놓은 리본들이 펄럭인다. 산객이 헤친 오솔길을 이십 분쯤 내려가자 또 다른 풍광이 일행을 기다린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이라는 주목 군락, 해발 천사백고지에 뿌리를 내린 주목에도 눈꽃들이 켜켜이 달라붙어 있다. 즈믄의 세월을 거스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출발 지점부터 성가시게 불던 바람이 어느새 솔내음을 퍼 나르며 땀을 씻어주는 청량제로 변한다. 산 아래 안개속은 눈과 얼음에 묻혀 황량한 바람소리마저 삼켜버렸다. 고즈넉하고 멋스러운 설국의 풍광에 취한 채 한발 한발 내딛는 사이 울창한 숲을 만난다. 백두대간을 품에 안고 하늘 높이 치솟은 원시림은 침목에 잠긴 채 깊어가는 겨울을 구가하고 있다.

숲속을 거니노라면 미소가 저절로 얼굴에 번진다. 숲은 사색의 공간이자 대화의 통로가 된다. 혼자 걸으면 인생의 화두가 돼 가슴에 꽂히고, 여럿이 함께하면 세상의 시름이 씻겨 지는 느낌이다. 길에서 인생을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을 주는 곳이 숲 말고 또 있을까?

산행 시작 여섯 시간 만에 오늘의 종착지 이승복 생가터에 이른다. 담도 울도 없는 소박한 초가한 채, 이런 평화로운 곳에서 끔직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때의 비극을 외면한 채 지나는 관광객들의 수다가 어지럽게 흔들린다.

한파 속에 눈길을 헤치느라 모두 지쳐 있다. 그래도 이 설국을 만끽하기 위해 새벽부터 먼 길 마다 않고 이곳까지 달려 온 게 아닌가.
자신과의 싸움, 승리자만이 누릴 수 있는 설산의 비경을 가슴에 묻
으며 길고 힘든 여정의 마침표를 찍는다. 저만치 산 정상엔 벌써 어둠이 깃들었다. 나뭇가지에도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고, 하루 내내 푸르던 하늘도 노을빛에 놀라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다.

세인들은 어떤 목적을 두고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이들과, 할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이들로 나뉜다. 그들이 마주치면 불협화음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서로 불편한 관계가 두려워 소중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만족감에 겨운 미소든, 불만에 찬 냉소든, 이 모두 함께 어울려야 한다. 새해엔 우리 굴렁쇠 산악회가 모든 이들에게 감동을 듬뿍 안겨주는 한해가 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군위군청
주민생활지원과 김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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