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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성창 시인 |
ⓒ N군위신문 |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어느새 해가 많이 짧아졌다. 바람도 차다. 지금은 12월, 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올 새해를 준비하는 연말이다. 겨울의 문턱을 들어섰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다. 거리에는 아직 제 갈 길을 찾지 못한 낙엽들이 방황하고, 마지막 잎사귀까지 애써 떨어뜨린 나무들은 우중충한 잿빛으로 변해 있다.
여름을 지나 풍성했던 가을의 기억을 지닌 채 그렇게 묵묵히 서 있는 낙목한천에서 숙연한 자연의 섭리를 느끼게 된다. 12월에는 도시들도 온기를 잃고 수척해 간다. 추위를 세워두고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는다. 그래서 거리는 한결 더 추운지도 모른다. 또 밤바람에 쓸려 또르르 나뒹구는 낙엽, 발에 밟히는 게 너의 운명이라지만 속절없이 추락하는 네 모습이 처연하다. 시인 레미 드 구르몽은 “우리도 언젠가는 가련한 낙엽이리라”라고 말한 낙엽의 신세가 절절히 느껴진다.
지난 한 해를 모두가 다양한 모습으로 각자 다른 빛깔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다들 참으로 열심히 살아온 한 해가 아니었던가. 언제나 이맘때는 한 해를 돌아보면 잘 한일 보다 후회하는 일이 더 많은 것 같은 아쉬움이 있다. 생각하면 왜 그렇게 작은 일들에 매몰되어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았을까. 사노라면 어쩔 수 없었을까.
날이 차가워질수록, 겨울바람이 세차게 불수록, 이 계절이 지나가면 내 나이가 기울어져 간다는 불안함에 고민이 깊어진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에 불현듯 사무치는 옛정에 빠져든다. 눈을 지그시 감으면 그림처럼 떠오르는 고향산천, 눈 내리는 겨울밤 초롱불 밝히고 화롯가에 둘러 앉아 정겨운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던 그때가 그립다. 기나긴 겨울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마당 깊숙이 묻어 둔 김칫독에서 살얼음 동김치를 포기 채 찢어 먹던 그 맛을 지금의 그 어떤 간식의 맛과 비교할 수 있으랴. 허지만 이젠 아련한 추억 속에서나마 떠 올릴 뿐이다.
이럴 때는 내 마음에 잔잔히 물결치는 노래가 떠오른다. 바로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이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느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어느새 세월이 흘러 흐트러진 삶과 낭만을 논 할 여유조차 사라졌다는 게 슬프게 다가온다.
연말 송년회 시즌이 왔다. 종친회다, 향우회다, 동창회다, 문학회 송년회 등 다이어리를 꽉 메우고 있다. 송년회는 대부분 술로 시작하여 술로 끝난다. 음주는 자기쾌락을 위한 지극히 이기적인 향락이며 행동이다. 나는 인간이 지상에서 제조한 최고의 명약은 술이라고 생각한다.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 들어가면 저릿하고 알싸한 전율이 온몸으로 퍼진다. 바로 그게 술 마시는 기분이다. 한 잔의 술이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해서 사람의 마음이 자연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믿는다.
술이란 무엇일까. 약도, 독도 아닌 유혹이라고 하는 편이 제 격일게다. 열이면 열 다 저마다 까닭이 있고 사연이 있는 게 술 마시는 이유다. 나는 아직은 술을 마시면서도 떠들지 않는 성품과 함께 술 속에서 생각하는 여유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술을 좋아 하는 것뿐이다.
좋은 술은 우리의 삶을 부드럽게 하고 인간의 성정을 여유 있게 하고 그래서 인간관계와 소통을 훨씬 원활하게 해 준다는 기능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의 멋을 돋워 준다는 소박함으로도 우리의 삶과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그 멋은 곧 풍류로 통하고 풍류가 곧 술이다.
내가 술을 마신 주력 50년 가까이 나와 술은 희, 노, 애, 락을 같이 해온 셈인데, 앞으로도 평생을 두고 술은 내 곁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즐겨 마신다기보다 사랑 하는 것처럼 좋아 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소주의 짜릿함이란 여간 좋지 않다. 소주는 서민들의 술이다.
애인처럼, 그림자처럼 멀리 하지 못하는 술, 적당히 마시면 유익하다는 걸 명심하면 되는 일이다. 독일의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술과 여자, 노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평생을 바보로 보인다.”고 했듯이 애주가는 정서가 가장 귀중한 것이다.
오늘은 을미년 마지막 달 셋째 주말이다. 벽에 걸린 달력도 낙엽과 함께 다 떨어져 나가고 한 장에도 며칠 남지 않았다. 한 해를 돌아보면 기쁘고 행복했던 날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슬프고 가슴 아팠던 날들이 어쩌면 더 많았던 것도 같다. 이럴 때는 등시린 사람일랑 주막집에 가서 거나하게 취하면 어떨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과 분위기 좋은 음식집에 가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12월 중 어느 하루 저녁만은 혼자이고 싶다. 허름한 잠바 하나 걸치고 혼자 한적한 거리를 거닐고 싶다. 불빛이 환한 주막집을 만나면 거기 들어가 소주 한 병 시켜놓고 가만히 앉았다 와도 괜찮으리라. 아니면 오늘까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헤아려보고, 그 동안 애써 잊으려했던 가난한 날의 젊었던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나보고 싶다. 그 동안 참 고생 많았노라고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나를 위로해 주고 싶다.
황성창 시인·수필가
(부산문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