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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텅 빈 벌판

admin 기자 입력 2015.12.20 22:42 수정 2015.12.20 10:42

↑↑ 권춘수 박사
ⓒ N군위신문
그는 말없이 통곡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더없이 아껴주고 사랑해 주었다. 어쩌다 이성 잃은 사람들의 발에 짓밟혀 엉망진창이 될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아픔을 참고 견디어 왔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마음속 맺힌 응어리를 소리 없이 토해버렸다.

수년 전, 오백여 평되는 자두 밭을 어렵사이 장만했다. 이른 봄에 이름 모를 잡초들이 밭 자락을 뒤덮어 버렸다. 어린잡초는 호미로 간단히 멜 수 있었지만 무성할 때에는 예초기로 베어야 했었다. 예초기 사용은 생각하는 것보다 쉽지 않았다. 남들이 하면 한나절이면 끝내버릴 것을 이틀이나 꼬박했다.

양 팔뚝은 개구리 잡아먹은 뱀처럼 울룩불룩했으며 힘 빠진 양쪽 팔은 벌벌 떨렸다. 몸살로 이 삼일동안 꼼짝 못했다. 몸살이 끝 난지 얼마 안 되어 또 풀을 베어야 했다. 체력의 한계에 부딪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힘들고 고된 일이였지만 풀을 베고 말끔하게 했다는 그 성취감이 피로에서 벗어나게 했다.

매일같이 논,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농사일을 전문가답게 처리하고 있다. 풀을 벨 때보면 풀이 웃자라지 않았을 때, 밭 전체를 한꺼번에 베지 않고 부분적으로 조금씩 베어나갔다. 자연과 생명이 함께 살아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밭은 언제나 말끔하였으며 빨갛게 익은 자두는 끊임없이 모든 사람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일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농촌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가뭄이 심했던 어느 해, 밭전체가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졌다. 부족한 상식으로 돼지 배설물이라도 주면 도움이 될까하고 듬뿍 주었다. 자두는 싱싱하고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수확 할 때가 되어 이웃집에서는 자두를 따서 경매장으로 가지고 갔다. 내 것은 아직도 푸르스름한 색깔로 나무에 매달려 있다. 어찌된 일인지 궁금해서 따먹어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돼지 분뇨냄새가 진동했다.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맥 빠지고 기가 찰 노릇이었다.

길 바로 옆에 밭이 있다. 오가는 사람들의 눈과 입이 무서워 늘 깨끗하게 해야 했다. 풀베기를 수없이 했어도 옆집보다는 늘 잡초가 많았다. 하루는 옆집 밭주인이 밭에 무엇인가 뿌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옆 밭주인은 농사를 잘 짓는다고 이름 난 사람인데 어떻게 짓고 있는지 궁금하게 여겨오던 차에 구경하려갔다. 풀을 죽이려 제초제를 뿌리고 있었다. 풀이 죽으면 흙도 살아남지 못할 텐데 생각도 없이 마구 뿌리는 것 같았다.

존경스럽던 밭주인이 갑작스레 살인마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깨끗한 밭고랑이며 햇볕을 받아 빨갛게 익은 자두를 볼 때면 제초제를 뿌리고 싶은 마음이 충동질했다.

애먹어가면서 풀을 벨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제초제를 구입해서 설명서대로 희석해서 풀에 뿌렸다. 하루가 지나자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었던 풀이 시들시들하여 고개가 힘없이 숙인 체 땅바닥에 쓸어졌다. 며칠 후 밭은 빗자루로 쓴 것처럼 말끔했다. 고생스럽게 풀을 베었던 것을 생각하니 황당했고 속상했다.

제초제로 오염된 흙은 기능을 상실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밭을 깨끗이 잘 멨다 하는 칭찬에 그만 눈이 멀어버렸다. 그 이후로는 앞으로 닥쳐올 재앙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제초제로 농사를 짓다시피 했다.

몇 해가 지났다. 비옥했던 밭이 딱딱한 흙으로 변하여 황량한 벌판으로 되어버렸다. 나뭇가지 끝이 하늘을 향해 쭉 벋어나기지 못하고 갈고리 모양처럼 고부라져 버렸다. 살이 터질듯 매끈한 나무둥치는 거칠거칠하고 실금같이 가는 금이 여기저기 보였다. 나무가 말라죽어가는 것 같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다. 자두나무 가지에 잎 피고 꽃눈이 맺혔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꽃눈들은 만개하기 시작했다. 다른 집 밭에는 개화가 시작되어 밭전체가 하얀 우산을 쓰고 있는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내 밭 나무들은 아직 잠에 취했는지 꽃눈이 어쩌다 하나 둘씩 내밀기 시작했다. 꽃눈이 피자마자 햇볕에 시들해져버렸다. 벌과 나비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시들한 꽃은 죽은 꽃과 다름없다고 했다. 폐농의 위기를 맞았다.

나무를 다 뽑아버렸다. 그 자리에 씨앗을 뿌렸으나 싹이 돋아나지 않았다. 어쩌다 돋아난 싹은 이내 말라버려 흔적만 남겨놓았다. 황량한 벌판이 되어버린 밭에 아무것도 심을 수 없게 되었다. 흙이 죽어버렸다. 내 잘못으로 일어난 과오에 쓰라림과 고통은 나 혼자 삼켜야 했다. 사람들은 “지가 배운 것 가지고 먹고 살지 뭐하려고 저렇게 고생스럽게 일하다 저 모양 저 꼴이 되었지”하고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에서 쓰려지면 남한테 비웃음거리만 된다. 죽어버린 땅 살려내야 한다는 비상한 각오로 다시 시작하였다. 운동장처럼 딱딱해진 밭에 소 거름 넣고 쟁기로 갈아 뒤엎고 그 위에 토양 영양제를 뿌리면서 몇 해를 거듭했다. 죽었던 흙이 멈추었던 숨을 다시 쉬면서 살아났다. 떨리는 손으로 흙 한 줌 움켜쥐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향긋한 흙냄새를 코가 삐뚤어지게 들여 마셨다.

땅에게 못할 짓 다했다. 입을 벌려 잡초를 말라 죽이는 제초제를 퍼 먹였다. 죽음을 당하면서도 꿀꺽꿀꺽 삼켰다. 끝내 소리 한번 치지 않고 죽었다. 그럼에도 살아서 찾아온 흙, 너에게 무어라 할 말이 없다.

위로와 기쁨보다 쑥스러움과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썰렁하고 황량했던 벌판에는 다시 꽃피고 새우는 소리가 가득했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수의학박사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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