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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멀어진 아주까리기름

admin 기자 입력 2016.01.10 13:05 수정 2016.01.10 01:05

ⓒ N군위신문
어딘가에서 낯설지 않는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양팔 뒤로하고 목을 쭉 빼서 냄새를 흠흠하며 그곳으로 찾아가보았다. 아무도 없는 호젓한 길모퉁이에서 은은한 향기가 맴 돌고 있었다. 어머니가 뒷밭에 가면서 흘려놓으신 흔적이다. 어머니가 지나간 자리엔 언제나 어머니향이 머물고 있었다.

시렁 한쪽구석에 사각소쿠리가 덩그러니 있다. 그 안에는 머리빗을 때 사용하는 참빗 몇 개와 머리 감아올릴 때 사용하는 비녀가 들어있다. 농사일 하면서도 어머니는 늘 단정했다. 머리를 곱게 빗질하고 긴 머리를 감아올리고 비녀를 꼽고 다녔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반지르르하게 바른 아주까리기름 향은 어머니냄새를 더욱 진하게 했다.

단오날에는 창포로 머리를 감았다. 귀신도 쫒고 머릿결도 좋아진다고 했던가, 어머니는 이웃집에서 얻어온 창포를 밤새도록 물에 담갔다가 이른 아침에 창포물로 나의 머리를 씻겨주곤 했다. 누나 머리길이는 소 꼬랑지처럼 길어서 엉덩이까지 닿았다. 창포로 감은 누나 머릿결은 바람 따라 나부낄 때면 은빛물결이 출렁이는 것 같았다. 아주 멋스러워 보였다.

피란길에서 돌아 온지가 얼마 안 되었다. 그때까지도 우리 동네에는 군인들이 남아있었다. 눈이 파랗고 머리가 곱슬머리인 외국군인도 있었다. 노랑곱슬머리를 한 번도 본적 없었던 나는 신기해서 또래들과 같이 구경하러갔다.

외국군인들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흡사 소털 굽는 냄새와 같았다. 토할 것만 같은 야릇한 냄새에 견딜 수 없어 돌아왔다. 노랑곱슬머리 사람들은 똑같은 냄새를 가지고 있는 줄 알았다.
그 이후로는 만정이 떨어지고 보고 싶은 생각이 영영 사라져 버렸다.

형수가 시집오면서 파마머리로 해왔다. 동네 아줌마들은 갓 시집온 새색시를 보려고 동네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동네사람들은 머리를 감아올리고 비녀를 꼽은 예쁜 색시인줄 알았다. 파마머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 집에는 새색시가 빠마머리를 해가지고 왔다. 희한한 세상이제’라며 곱슬머리 인줄 알고 쑥덕거렸다.

곱슬머리는 서양 사람의 것이라며 양놈 양년이라고 놀려댔던 시대이었다. 고집이 세다는 속설로 시골에서는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별꼴 다 보았다. 누나친구가 외국군인과 혼례도 올리지 않고 같이 살았다.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혀졌다. 그 집 딸년이 미쳐도 대강 미쳤지, 양놈과 눈이 맞아 저 집 방구석에서 같이 지내고 있다네. 커가는 아이들 앞에 이게 무슨 작태이고, 동네에서 쫒아내어라 하며 야단쳤다.

동네 아줌마들은 앉으면 그 이야기뿐이었다. ‘참 이상도 하제, 까맣든 머리가 노랗게 되어버렸고 곱던 긴 머리도 수수 뭉텅이처럼 곱슬머리로 변해져버렸다. 양놈하고 같이 자면 저렇게 되는가봐’하고 배를 움켜쥐고 한바탕 웃음을 자아냈다.

그럼에도 곱슬머리는 유행을 타고 서서히 농촌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다. 파마 아줌마가 기구를 들고 동네마다 다녔다. 일손 바쁜 농번기에도 찾아왔다. 전화가 흔하지 않는 시절인데 어떻게 알았는지 금방 사람들로 가득했다. 종일 일하고 힘들어도 고달픔은 간곳없었다.

파마하는 동안 아줌마들은 빙 둘러 앉아 주위에서 일어났던 온갖 이야기로 꽃을 피우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마 아줌마는 입담도 좋고 기억력도 좋았다. 목골댁, 본동댁 하며 택호를 불렀다. 택호를 어떻게 아는지 우습답고 떠들어대며 서로 친근감을 두텁게 쌓아갔다.

유행보다 더 무서운 것 없었다. 파마하고 싶은 욕망은 찜통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갓 시집 온 며느리도 파마아줌마 왔다는 소식을 듣고 시어른들 모르게 파마하려 달려갔었다. 유행을 따라가고 싶은 여심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엉덩이까지 곱게 늘어진 머리는 동양의 미라고 했던 이야기가 옛이야기로 되어버렸다. 생머리는 갈 길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헤매고 있었다. 파마약냄새가 좁은 골목길에 등천했었다. 고약한 냄새에 코끝을 움켜쥐고 골목길을 빠져나왔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어져 버렸다.

곱슬머리가 세상 밖으로 나온 지가 어언 반세기가 지났다. 생머리는 화려했던 순간들의 영광을 곱슬머리에 고스란히 물려주고 훌훌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유행에 민감하지 못한 난 어쩔 수 없다. 곱슬머리로 꽉차버린 세상에서.

대구가축병원 원장·수의학박사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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