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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미옥 해설사 |
ⓒ N군위신문 |
2008년 군위군 문화원에서 군위에 대한 과거의 기록을 찾아 실록 내용에 산재 되어 있는 옛 군위현과 의흥현의 기록들과 관련된 사실들을 모아 조선왕조실록 군위사료집이 발간되었다.
군위의 현감이었던 노호(盧浩) 인물을 소개 하기 전에 먼저 군위현과 의흥현에 일어났던 사건들 중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는 몇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군위와 관련된 기록은 태종 6년 (1406)4월 11일 신미 군위현에 서리가 내리다로부터 시작하여 조선말기인 고종43년(1906)4월11일 의흥 홍주 등의 도적을 순찰 체포하기 위한 경비를 비준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 역대 군위현감의 이름은 32명 의흥현감은 19명으로 발췌되어 있다.
수령에 관련된 실록의 기록은 새로 수령에 임명되어 사조(辭朝)국왕에게 인사를 하고 조정을 떠나 임지로 가는 것이다.
또한 제직중 비리가 발각되어 감사나 중앙의 사헌부, 사간원에게 탄핵을 받은 현감 이름들도 나타난다.
때론 암행어사에 의해 낮은 평가를 받아서 파직되는 경우도 있지만 간혹 좋은 평가를 받아서 승진되기도 하였다.
영조대 군위현감 남태보, 성종대 의흥현감 김수문, 영조대 의흥현감 이사제, 고종대 의흥현감 윤영선 등은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군위지역 수령을 역임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중앙 정계에서 그 경험을 보고한 경우도 기록에 나타나기도 하는데 세종대 군위현감 이보흠이나 군위현감을 하던 남태보는 중앙정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신의 동생 남태기에게 지역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여 정책수립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실록에는 각고을의 농사작황을 보고한 내용과 태종7년(1407)에는 의흥의 인각사와 군위의 법주사등 여러고을의 복을 빌던 절을 명찰로 지정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태종12년(1412)5월2일 경상도 의흥과 상주 등지에 우박이 내려 삼과 보리가 상했으며 태종16년 (1416)4월 경상도 의흥 군위 등과 충정도 등에 지진이 일어 났는데 안동이 더욱 심했다고 한다.
세종 7년 (1425)1월에 군위 의흥에 지진이 일어 나더니 2월11일에는 경상도 의흥, 성주, 합천 등지에도 지진이 일어 났다라고 한다.
지진에 관한 기록은 군위 의흥을 합하여 모두 14차례 나타 났는데 세종, 중종, 명종대에 지진이 집중적으로 있었고 현종대 이후 17세기 이후로는 지진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조선시대 국왕은 하늘의 뜻에 따라 통치를 하였으므로 국왕은 자연재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에서는 관상감을 두어 천문, 지리, 기후, 등을 관측하였으며 지방관들도 지역에서 나타나는 재이현상에 대한 관찰을 하여 정기적으로 보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편 서리나 우박 홍수 안개 천둥과 벼락 바람 등 재이현상의 자연재해에 관한 기록도 총 32차례 보이고 있다.
괴이한 현상에 대한 기록으로 아들 셋을 출산한 사례와 괴이한 송아지나 개를 출산한 사례와 눈이 붉고 깃이 흰참새 등에 대한 보고도 있다.
그중 재미있는 것은 1554년 (명종9) 군위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는 칠천탄(漆川灘)물이 끊어진 현상이다.
칠천탄은 낙동강 상류에 있는데 흐르던 물이 묘시에 갑자기 끊어졌다가 다시 흘렀다고 나오는데 하(夏)나라와 주(周)나라가 망했을때를 비유하며 냇물이 끊어지는 변은 그 반응이 참혹하다는 것이다.
그해 12월 29일 을미에 경상도 군위에 무지개가 섰다.
재이현상이 일어 나자 큰 변이 있을 것을 암시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불안함을 엿볼수 있다.
세종7년(1425)12월24일 기축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군위현감 노호(盧浩)인물에 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져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세종7년(1425)12월24일기축 군위현감 노호가 사조(辭朝)하니 인견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군위현감(軍威縣監) 노호(盧浩)가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그의 내력(來歷)을 물으니 호(浩)가 대답하기를 “성균박사(成均博士)로서 이 직(職)을 배명(拜命)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가 유생(儒生)이니 어찌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모르리요” 마는 그러나 내가 친히 가르치는 것은 그것을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수령이 힘써야 할 정사는 그 종류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백성에게 어질게 하는 것이 중하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백성을 다스리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하였다.
노호는 성균관의 정8품 벼슬인 성균박사로 학문에 관련된 직무에서 군위현감 지방관리로 이직을 명 받았다는 내용에서 보듯이 학자로서의 근본과 인품을 엿볼수 있다.
또한 세종이 태종의 능을 방문할 때 종4품의 경력(經歷)의 벼슬로 수행하여 그 곳에서 임금에게 옷을 하사 받았으며 경상도 노비추쇄경차관(奴婢推刷敬差官) 수사헌집의(守司憲執義)등의 직(職)을 수행(修行)할 때의 기록이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노비추쇄경차관(奴婢推刷敬差官)은 불법으로 도망간 공노비와 사노비를 찾기 위하여 특수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된 관직이다.
1427년(세종9) 경기도 양주에 살았던 장전의 부인 신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계집종 4구를 잡기 위해 관아의 도움을 요청한 문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노비들은 사람이 아니라 재산이었기 때문에 도망가서 종적을 감추면 주인은 재산을 잃어버리게 된다.
몇해 전 드라마 추노가 노비를 잡는 또다른 추노꾼집단의 이야기로서 인기중에 방영된바 있었다.
노호집안인 안강노씨는 정조4년 1780년 무과에 급제한 노상추 이전까지는 영남 남인의 기풍을 지닌 사적 집안이었다.
안강노씨의 선산(善山) 입향조(入響祖)로 알려진 고려 장흥고사를 지낸 노한이며 이후 선산에 근거한 안강노씨는 군기시첨장을 역임한 노종선(盧從善)과 동생인 사간(司諫)제주목사(牧使)를 역임한 노희선(盧禧善)을 각각 1세로 계대(繼代)를 이어가고 있다 2세는경흥부사인 노인도 3세는 사헌부집의 노호(盧浩)이다.
군위 입향사의 내력을 보면 안강노씨 1세였던 노희선은 선산(善山)에서 군위군 효령면 오천리에 이주 정착하여 140여년을 살아오고 있었다.
그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곳이 왜적의 통행로가 되어 잦은 약탈을 견디지 못하고 이충무공 진중에서 무장으로 공을세워 일등공신을 득한 노대기(1556~1601)가 십오리 떨어진 인근 거매골로 이주하여 140년간 거주 하였으나 병란과 흉년으로 인하여 선향 인근 선산 사창에 이거 하였고 11세 노계문(盧季文1735~1810)은 군위군 산성면 봉림리의 전주이씨 임영대군(臨瀛大君)의 후인 이세신(李世信)의 녀와 혼인하여 이들의 후손들은 봉림리에서 260여년간 정착하여 살고 있으며 처음 노희선이 군위에 입성한 후 500여년간 자리를 잡고 있다.
군위 현감을 지냈던 노호(盧浩1394~?)는 조선초 명재상(名宰相)이었던 해화당 (海華堂) 서선(徐選1367~1433)
의 사위이며 노호는 야은 길재선생 문하에서 수학 하였고 1419년 세종 1년 강호산인 김숙자와 문과에 동방급제 하였으며 성균박사를 시작으로 군위현감등 외직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집의 등 주요 청요직을 역임 한 것을 보면 바른정사를 했던 당대의 인물임을 알수 있다.
그의 후손들은 군위산성 봉림에서 대대로 삶의 터전을 이어오고 있다.
우리고을의 인물인 노호현감의 발자취와 그의 업적을 기리며 지방민의 향토애(鄕土愛)로서 인물로 본 문화에서 노호현감을 되세겨 본다.
노호현감의 후손이신 노영환 前산성농협장님께서 참고자료를 보내 주셨습니다.
한 가문의 영예로운 인물이기도 하지만 군위군 출신의 현감이 수령직을 맡았다는 것에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이 있듯이 군위인의 후예로서 자부심을 가지기도 한다.
군위군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