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인물 향우소식

21년간 말기환자를 보살펴온 손정자 씨(고로면 출신)

admin 기자 입력 2016.06.02 10:04 수정 2016.06.02 10:0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웅

 
↑↑ 손정자 씨
ⓒ N군위신문 
그는 이제 울지 않는다. 환자의 마지막 삶에 필요한 건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따뜻이 손을 잡아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해온 손정자(74)씨는 눈물 마를 날 없던 시기를 고요히 건너와 단단하고 씩씩한 사람이 되어 있다.

손수 기른 채소로 환자들의 음식을 만들어, 조금이라도 더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 모습은 그대로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 마음과 그 눈빛이 따뜻해서, 환자들은 그의 손을 놓지 않는다.

<인생의 마지막 동행, 호스피스>

요즘 그는 심심찮게 ‘잔소리’를 듣는다. 추운 날엔 옷 든든히 입고 나가라고, 굿은날엔 그냥 집에서 쉬라고, 툭하면 전화해오는 사람이 그에겐 있다. 전화통화는 언제나 ‘오래 사셔야 한다’는 말로 끝이 난다.

‘누가 할 소린지 모르겠다’고, 그 때마다 웃으면서 그는 생각한다. 그에게 잔소리를 해오는 이는 자원봉사로 인연을 맺은 말기암환자다. 60대인 그녀는 자기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송정자 씨가 혹여 아프기라도 할까봐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사이, 그가 맺고 있는 관계들은 보고 있으면, ‘넓히는 데 급급한’우리들의 인맥이 부끄러워진다.

“1994년 탈수증세로 계명대 동산의료원에 입원한 적이 있어요. 그 때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처음 목격 했죠. 뇌졸중으로 거동을 못하시는 시어른을 모시고 있던 터라, 말기암환자들 곁에서 손과 발이 돼주는 봉사자들의 모습이 마음을 움직였어요. 때마침 평소 알고 지내던 호스피스 병동 수간호사가 자원봉사를 해보지 않겠냐고 권해오시더라고요. 망설일 이유가 없었어요”

관련 교육을 받고 곧바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지금은 105명의 호스피스 봉사자가 오전 오후로 나눠 환자들을 보살피지만, 당시만 해도 4, 5명의 자원봉사자가 모든 환자를 온종일 보살펴야 했다.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는 홀몸환자들이 많아 늘 일손이 부족했고, 남자 봉사자가 없어 남자 환자들의 목욕도 도맡아야 했다. 일주일에 두 세 번, 아침 일찍 병원에 나가면 어둠이 내린 뒤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병원에서 급하게 연락이 오면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가 사는 경산에서 대구 동산의료원까지는 버스로 한 시간 거리, 혹여 늦은 것은 아닐까, 마음이 급해지곤 했다.
ⓒ N군위신문

“한밤중에 전화벨이 울려서 받아보면, 임종을 앞둔 환자분이 저를 찾는 경우가 많았어요. 환자의 마지막 삶에 동행했으니 배웅도 따뜻하게 해드려야죠. 가만히 손을 잡고, 편안히 눈 감을 때까지 곁을 지켜요. 처음 몇 년간은 홀로 우는 날이 많았어요. 하지만 이젠 안 그래요. 눈물 흘릴 시간에,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요.”

홀몸환자가 사망하는 경우엔 그가 직접 시신을 닦아 줬다. ‘마지막 목욕’을 손수 해드리고, 장례를 직접 치러줬다. 화장절차까지 마치고 나면 좋은 곳에 뼛가루를 뿌려주고 고인과 이별했다. 호스피스 병동에 그 일을 전담하는 팀이 생길 때까지, 5년 정도 그 일을 계속했다. 유가족을 보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부모를 잃고 졸지에 가장이 된 아이들의 경우, 주민센터와 교회를 연결해 학비를 후원했다. 심리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가족 잃은 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밥을 먹이거나 맘을 내어줬다.

<은퇴해도 지금처럼, 언제나 처음처럼>

방문 호스피를 시작한 건 2005년부터, 집에서 요양하는 환자들을 보살펴 줄 자원봉사자가 필요해지면서, 그를 비롯한 ‘베테랑’ 봉사자 5명이 방문 호스피스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베테랑들을 투입한 건 방문 호스피스 활동이 훨씨 더 어렵기 때문이다. 홀몸환자들이 대부분인 데다 환경이 매우 열악해서 봉사자가 해야할 일이 끝없이 많다.

“초창기엔 집 청소며 냉장고 청소부터 했어요. 혼종일 집에 계시는 분들인데 조금이라도 쾌적한 공간에서 지내게 해드리고 싶어요. 목욕도 큰일이더라구요. 집들이 추우니 목욕탕으로 모시고 가야했고, 장우(인공항문)을 차거나 호흡기를 단 분들을 세심히 배려해야 했죠. 환자분들의 마음을 여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방문을 원치 않는 분들이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말동무가 돼드리며 끈기 있게 기다렸어요. 혼자였다면 해내지 못했을 거에요. 저와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그에게는 오랜 세월 함께해온 ‘호스피스 짝중’이 있다. 김영미(60)씨가 바로 그다. 병원 호스피스 시절부터 자원봉사를 같이 해온 두 사람은 2005년 방문봉사 때부터 아예 한 팀을 이뤄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고 있다. 그들이 함께 돌보는 환자는 모두 16명이다. 공식적인 봉사 횟수는 한달에 두 번이지만, 두 사람이 환자와 함께해온 날은 언제나 그 보다 많다.
ⓒ N군위신문

그들은 결코 ‘맨손’으로 환자들을 방문하지 않는다. 집 앞에 넓은 텃받을 두고 있는 손정자 씨는 각종 채소들을 손수 기르고, 그것들로 여러 반찬을 만들어 그 때 그 때 싣고 간다. 환자들이 쉽게 넘길 수 있도록 죽이나 곰국을 수시로 끊이는 것은 물론, 환자들의 몸을 생각해 반찬을 심심하게 만드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직접 기른 해소는 일일이 다듬어서 가져다 준다. 달걀도 틈틈이 챙겨다주는데 그의 집에서 키우는 닭들이 하루하루 낳은 유정란이다. 그의 지극한 정성이야말로, 환자들에겐 최고의 ‘치료제’다.

“4월이 되면 우리 집 마당 꽃잔디가 한창이에요, 벚꽃도 흩날리고요, 그 즈음에 환자들을 집으로 초대해요. 한 번에 모두 모셔오는 것이 쉽지 않아 하루에 대여섯 분씩 사흘로 나눠서 모셔오죠. 바깥 구경을 좀처럼 하지 못하는 분들이니, 우리 집으로라도 봄 소풍을 오시라고 시작한 일이에요. 함께 쑥도 뜯어요. 그날만큼은 그 누구도 환자가 이니에요”

11월에 호스피스 병동의 추모모임을 그의 집에서 한다. 유가족과 병원관계자, 자원봉사자 등이 모여 고인을 추모하는 프로그램인데, 90년대 후반부터 그가 장소와 음식을 제공해 왔다. 30여명 분의 식사를 도 맡으면서도, 힘들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그는 없다.

사실 그의 ‘음식제공’은 역사가 꽤 길다. 호스피스 봉사를 시작하기 전인 1992년부터 그는 일주일에 한번씩 노숙인들의 밥을 지어 대구역까지 퍼 날랐다. 대구역에 홈리스복지회가 생긴 지금도 한달에 한 번은 따뜻한 밥을 지어 그 곳으로 간다. 삶의 끝 자락이나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를 지어먹이는 일, ‘엄마’의 마음으로 그는 기꺼이 그 일을 해낸다.

“75세가 되면 호스피스 자원봉사에서 은퇴를 해야 해요. 정식 활동은 1년 밖에 안 남았지만, 지금 만나고 있는 환자들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갈 거에요”

누군가의 마지막을 오래도록 지켜봐온 그는 함부로 ‘끝’을 말하지 않는다. 평소처럼 동행하고 평소처럼 배웅한다. 그에게는 지금이 늘 ‘처음’이다.

<제16회 우정선행사 책 내용 발취>


저작권자 N군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