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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만 원장 |
ⓒ N군위신문 |
나의 고향은 경북 군위군 의흥면 원산3리 697번지이다. 원산리는 1, 2, 3리가 있는데, 읍내리에서 가장 가까운 속칭 ‘샛터’ 라고 불리우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그 마을 중에도 입구 첫 번째 집이라 거북산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그때는 아름드리 꿀밤나무가 대여섯 그루 서있었다. 지금은 여러해 전 집안 아저씨가 그 집을 구입하여 초갓집을 허물고, 기왓집을 지어서 살고 계시기 때문에 예전의 모습은 간곳이 없다.
초등학교에 다닐때 우리 친구들은 소를 먹이려 매일 거북산에 갔다. 소를 풀어놓고 여러 가지 놀이도 하면서 놀다보면 해가 너무 짧았다.
그러나 우리 집은 늘 큰 황소 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함께 놀지를 못했다.
혼자 소를 붙들고 봇도랑이나 밭둑에서 소를 먹이면서, 거북산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다.
특히 초등학교도 가기전에 어머니가 저 세상으로 가셨기 때문에 많이 외로웠다.
아버지는 동네 이장을 하시면서 민주공화당 마을 관리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집엔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책이 많았다. 독서를 좋아해서 많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 당시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주인공 ‘어니스트’ 어린 소년은 어머니와 같이 살았는데, 오둑막집 문 앞에 앉아 큰 바위 얼굴을 매일 바라보며 “옛날의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언젠가 바로 저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훌륭한 사람을 만나게 될것이다.”란 꿈을 늘 가지고 있었다.
아직도 많은 늙은이들과 어린이들이 열렬한 희망과 변하지 않는 신념으로 이 오래된 예언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나도 어렸을 때부터 큰 믿음을 하나 갖고 있는 것이 있었다.
거북이의 꼬리인 구미에 박정희 대통령 같은 훌륭한 인물이 탄생 했는데, 거북이가 통째로 있는 이곳에도 “거북산(龜山)의 정기를 받은 훌륭한 큰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라는 것을.
그래서 몇해 전부터 모교인 의흥중 졸업식에 가서 총동창회장 축사를 할 때도 “거북산의 정기를 받아 훌륭한 인물이 돼라”고 강조 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닐 때도 거북산 앞을 매일 다녔고, 대학 졸업 후 의흥면에 근무 할 때도 자전거를 타고 매일 출 퇴근을 하면서 거북산 아래를 지나며 다짐을 했다.
그 당시엔 거북산이 산성면 원산리 이고, 거북산과 내가 가장 가까이 살고 있으니 “혹시 내가 그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인데도 불구하고 만 38세부터 대구 중구에서 공천을 받아 세 번이나 국회의원에 출마한 용기는 바로 ‘거북산’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각종 단체의 회장을 맡아 ‘한국인물사전’과 각종 명감에도 고향이 ‘군위’라는 것과 경력이 등재돼 있으니, 이 모두가 ‘거북산의 정기’를 조금이라도 받지 않고는 절대로 불가능 했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나는 매일 거북산을 생각 한다. 그것은 다음 카페 ‘거북산’을 운영하시는 카페지기 좌상(座上) 심천용 대선배님 때문이다. 매일 카페에 들어가서 인삿말도 남기고, 시사칼럼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적 마을 앞 강가에서 소꿉장난으로 재미나게 놀다가 해가 빠지면 모두 내버리고 각자 집으로 헤어졌다. 그와 같이 우리 인생도 하루 하루를 바쁘게 살다가 어느날 쓰러지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남겨 두고 쓸쓸히 혼자 저 세상으로 가게된다.
커다란 기계의 조그마한 부속품처럼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며 사는 것이 애향이고 애국 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오래전에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니 삶이 너무나 편안하다.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태어난 굴 쪽으로 둔다고 하는데, 어느듯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보니 고향이 그립다.
여러가지로 부족한 나에게 용기를 준 ‘거북산’한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수만 칼럼니스트
한국컴퓨터속기학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