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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김구 선생님, 존경합니다(3)

admin 기자 입력 2017.01.02 22:11 수정 2017.01.02 10:11

↑↑ 박두익 대표
ⓒ N군위신문
그러나 티끌진 속세와 인연을 다 끊지를 못하였거나 망명객의 임시 은신책이기도 하여 번뇌없이 깨끗한 열반의 세계에 불교의 도에만 일생을 희생할 마음을 갖지 못한다.

한번은 사찰내 연회 중에 유전 천세 불 천세 아역 일반 군 일반(儒傳 千歲 佛 千歲 我亦 一般 君 一般: 유가도 천년 이어지고 불가도 천년 이어 간다. 나도 평범한 사람이요 그대들도 평범한 사람이로다)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산사가 들썩하도록 걸작이니 절창이니 야단하는 바람에 이 소식이 평양에 전파되어 기생들 노래 곡조로 불리었다 한다.

김구 선생의 나이 33세가 되면서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자기 집인 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일 외에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때 모였던 동지들이 사방으로 헤어져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고 다시 황해도로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게 된다.
그리하여 해서(海西) 교육총회를 조직하고 그 회의 학무총감을 맡아 전 도내 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하는 책임을 졌다. 이어서 각 군을 순행할 때에 배천 군수의 청에 의하여 배천 읍에 당도하니 군수가 선창하여 “김구 선생 만세”를 부르자 군중이 제창하였다.

1911년 신해(辛亥)년이면 김구 선생의 나이가 36세가 되는데 안명근 사건과 관련하여 황해도 일대의 평소 애국자로 지목된 인사들이 거의 다 체포되어 가는데 선생도 양산학교 사무실에서 일본 헌병에 연행되어 갔다.

연행되자 바로 극심한 고문이 이어지는 중에 “일본 식민지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사만 표시하면 즉각 총독에게 보고하여 이 같은 고통을 면하게 할 뿐 아니라 조선을 통치하는데 순전히 일인(日人)만으로 할 것이 아닌즉 조선인 중에 덕망이 있는 인사를 택하여 정치를 하려는데 당신같이 충후하고 덕망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이에 순응함이 어떠냐?”면서 수차례 회유하였으나 단호하게 거절하여 15년 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 후 김구 선생은 명치(明治) 천황의 사망으로 7년으로 명치의 처의 사망으로 5년으로 감형되어 실형을 살았다.

수감 중인 서대문 감옥에는 역대로 진귀한 보물이 있었다. 지난날 이승만 박사가 자기 동지들과 투옥되었을 때에 서양인 친구들에게 연락하여 옥중에 도서실을 설치하고 내외국의 귀중한 서적을 구입하여 5~6년간 긴 세월 동안 죄수들에게 구국(救國) 흥국(興國)의 도(道)를 가르쳤다.

김구 선생이 이박사의 손때와 눈물자국이 어린 서적을 볼 때 내용 보다는 배알치 모한 이박사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의 느낌을 받았다.

사실련(사회정의실현시민연합) 중앙회 대표 박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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