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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두익 대표 |
ⓒ N군위신문 |
김구 선생은 39세에 감옥살이 잔여 2년을 앞두고 세상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할까 구상을 하였다.
일본인이 관리하는 백성의 호적에서 떨어져 나가기 위하여 이름을 구(龜)에서 구(九)로 고치고 호를 백범(白凡)으로 하기로 하였다. 호를 이렇게 지은 이유는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지금 나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자는 것이었다.
드디어 김구 선생이 가출옥하여 수십 명의 친구들이 다투어 달려들어 원망과 기쁨이 뒤섞인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부인 최준례 여사는 극히 수척한 기골로 여러 부인들과 같이 잠시 김구 선생의 얼굴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친구들과 먹을 음식 준비에 골몰하였다.
김구 선생의 모친 곽낙원 여사가 김구 선생에게 이르기를 “네 처의 절도 있는 행동은 나는 고사하고 너의 오랜 친구들이 감동하였나니 네 처를 결코 박대하면 안된다.”라고 하였다.
김구 선생이 44세가 되던 해가 1919년인데 3.1운동을 계기로 상해로 출국하여 4월 11일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국무총리에 이승만 박사가 선출되고 경무국장(警務局長)에 도산 안창호 내무총장의 추천으로 백범 김구가 임명되며, 9월에 임정 총리제는 대통령제로 변경되어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이 취임한다.
1923년 김구 선생이 내무총장으로 시무하는 중에 부인이 아들 김신(金信)을 출산한 후 넘어져 다쳐 폐렴으로 발전하여 그 이듬해 작고하였다. 1927년 11월 아무리 축소한 형태일망정 일국의 원수인 국무령(國務領)에 추대될 때에 자기가 취임하게 되면 국가위신이 추락하게 된다고 사양하였으나 주위에서 혁명시기엔 관계없다고 강권하여 승낙하게 된다.
1931년 김구 선생의 나이 56세 때에 이봉창(李奉昌) 의사가 의기남아로서 살신성인(殺身成仁)할 대 결심을 품고 일본에서 상해로 임시정부를 찾아와 김구 선생에게 품신하길 “제 나이 30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0세를 더 산다 하여도 과거 방랑생활을 맛 본 것에 비하면 더 늙는 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 하면 30년 동안 육신으로는 인생 쾌락을 대강 맛을 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기 위하여 동경의 일본 천황을 죽여서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임시정부에서는 운동계가 침체하여 군사공작을 못할 바에야 테러공작이라도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였다.
이에 12월 중순경 김구선생과 이봉창 의사가 비밀히 여관에 동숙하면서 일본 천황을 죽이는 거사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8일 이봉창 의사가 일본 천황에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사실련(사회정의실현시민연합) 중앙회 대표 박두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