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권춘수 원장 |
ⓒ N군위신문 |
제집 드나들 듯 한다. 떠날 때는 화려했던 모든 영광들을 조용히 내려놓고 말없이 훌쩍 떠나버린다. 어느새 다시 찾아오고파 몸부림치며 꽃과 나비를 등에 업고 가쁜 숨을 내 쉬며 달려온다.
조용하던 세상이 금세 시끌벅적하며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든다.
봄. 냄새만 향긋하며 뭣 하나 마음씨가 고와야지. 일상에서 심술과 얄궂은 심보를 가지고 짓궂게 하는 일을 보면 가관이다. 개화기가 되면 벌과 나비들은 숨 돌릴 틈 없이 분주하다. 어느 때는 꽃봉오리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수다 떨고 입맞춤하며 사랑을 속삭인다.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봄이 심술 나서 가만히 있지 못한다. 겨울이 남기고 간 세찬 바람을 불러 일으켜 꿀이 가득한 꽃봉오리를 마구잡이로 땅바닥에 내동이 쳐버린다.
기가차서 어이가 없었다.
한 발짝도 뛸 힘없어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한 해 동안 먹을 양식거리를 하루아침에 망쳐놓았으니 쾌심할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치미를 뚝 떼고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심술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하다.
봄의 심보는 행굽기가 말 할 수 없다. 겉으로는 따스하고 포근한 채 하면서도 속은 겨울의 찬 기운이 가득했다.
겨울을 무사히 잘 넘긴 장독이 무슨 죄라도 있는 것처럼, 이른 봄에 부어놓은 물이 얼어서 장독이 터져 버렸다. 봄에는 속살이 훤히 들어다 보일 듯 말 듯 한 얇은 치마저고리가 대세이다. 아직 이른 봄인데 격에도 맞지 않는 옷을 꺼내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심보가 뒤틀렸다. 겨울의 끝자락에 남은 찬바람으로 전신을 휘감아 버렸다. 온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오그려들었다. 견디다 못해 오만가지 욕을 다 했다. 속이 한결 시원했다.
봄이 오는 문턱에서 머슴들은 삽짝기둥 붙잡고 운다는 말 있다. 겨우내 놀다가 소 몰고 논밭 갈아 씨 뿌릴 채비를 해야 한다. 긴긴 하루에 해야 할 일도 많고 전신은 힘이 빠져 나른하고 죽을 맛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모든 것 다 싫다. 봄이 가져다 준 선물 아름다움과 향기마저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긋지긋한 악몽의 계절인 것 같다.
신세타령이 절로 나온다. 그래서인지 봄에 낮의 길이가 하지보다 지겹도록 더 긴 것 같다. 이토록 힘들게 하는 봄의 심보는 참으로 알 수 없다.
그런가하며, 봄의 씀씀이는 헤프기가 말 할 수 없다. 기분이 좋으면 따스한 햇살을 사정없이 내려 쬐며, 꿀이며 향수를 마구 쏟아 준다. 내키지 않으면 거친 봄바람을 쌩쌩 불어대며 봄의 향연을 한 순간에 날려 버린다. 제 멋 대로 불어대는 봄의 행실머리는 아무리 이해 하려해도 이해 할 수 없이 고약하고 찔뚝 없다.
봄은 고귀하고 아름답지만 꼭 그러한 것만 아니다. 혹한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찬바람이 봄바람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아지랑이 피는 언덕위에 쌀쌀한 봄바람이 불어댄다. 추위를 이기지 못한 꽃송이는 견디다 못해 벌렸던 입을 다물어 버린다.
양 볼에 연지 찍고 방실거리며 찾아온 새색시가 그만 시무룩해진다. 염치도 없이 찾아온 봄의 심보를 보고 꽃들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본다. 말없이 울먹이며 홀연히 그 자리를 떠나 버린다.
아직도 아침저녁으로는 겨울이 남긴 찬바람으로 쌀쌀하다. 나무 가지에는 얼었던 얼음이 서서히 녹아내린다. 엉성하던 가지는 기름칠 했던 것처럼 반지르르하다. 뽀송뽀송한 털옷을 걸쳐 입은 꽃망울에서 숨 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드린다. 수줍은 듯한 꽃봉오리가 불그스름한 입술을 살며시 내 미면서 생긋 웃는다. 탐스럽게 맺힌 볼록볼록한 꽃망울들이 곧 터질 것만 같다.
고요한 밤중 아무도 모르게 소리 없이 홀로 피어났다. 꽃망울들은 시샘하듯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붉고 하얀 꽃들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 펼쳐진다. 향기가 하늘을 등천 한다. 꽃과 나비와 벌들은 그동안 소원했던 시간을 찾느라 부산을 떤다. 이 보다 더 아름답고 신기한 세상 또 있을까 하고 봄의 향긋한 맛을 마음껏 들이마셔 본다.
버르장머리 없는 봄이 불쑥 나타난다. 풍년을 기원하며 정성을 다했다. 들녘은 온통 울긋불긋한 꽃 우산을 쓰고 멋을 한껏 부렸다. 고요하던 날씨가 갑자기 찌뿌듯하여 졌다.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저녁때가 되어 더욱 세찬바람이 불었다. 행여 만개한 꽃들이 얼어버릴까 걱정이 됐다. 간밤에 하얀 서리가 소리 없이 여린 꽃에 내려앉았다. 꽃들은 해맑은 웃음을 잃어버리고 흰 가루를 뒤덮어 쓴 채 웅크리고 있다. 꽃들은 꽁꽁 얼어버렸다. 이른 봄부터 힘들어 시작했던 일들이 한 순간에 망쳐 버렸다. 앞이 캄캄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이놈 하고 통곡했다. 얼어붙은 꽃봉오리를 어루만지면서 결실을 맺을 때 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 밖에 더 할 말 없다. 그럼에도 그 놈은 염치가 있어 자두 몇 개를 들고 찾아왔다. 뻔뻔스러운 얼굴을 보고 꾸짖지도 못하고 웃어버렸다. 내년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 달라며 조용히 타 일렀다. 포근히 안아주며 맛을 본다. 자주 맛이 그 어느 때 보다 더 달짝지근했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