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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밀 서리

admin 기자 입력 2017.07.03 11:04 수정 2017.07.03 11:04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 있다. 살기 위해서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서슴지 않았다. 배고픔을 이겨내지 못했던 장발장은 끝내 빵을 훔쳤다. 법은 냉엄했고 이를 용납해 주지 않았다. 어렸을 때 소 풀 먹이러 가면 밀 서리를 해 먹었다.

불안·초조·공포감은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도 죄의 의식이라고는 느끼지 못했다. 서로가 어렵게 살아왔기 때문에 어른들의 관대한 용서가 자칫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까 걱정스러웠다.

고통 중에서 배고프고 굶주리는 고통이 가장 힘들고 견디기가 어려웠다. 한국전쟁을 겪었던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온갖 어려운 고비를 다 겪으며 지내왔다. 피난 생활 끝내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돌아왔다. 집은 불에 타 없어졌고 동네는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남은 양식이라고는 장년들이 하루 이틀 먹으면 없어질 정도였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이마에 비 오듯 땀 흘리며 집을 지어야 했다. 새참이라고는 보리 개떡 몇 개가 전부였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은 자질구레한 일들은 나에게 시켰다.

온종일 아버지 허드렛일을 거들다 보며 어느 때는 하늘이 노랗고 빙빙 도는 때도 가끔이었다.
이른 봄, 양지바른 산 중턱에 이름 모를 꽃망울들이 앞다투어 자태를 뿜어댔다. 덩달아 온갖 잡풀들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설레설레 저었다. 우리 또래들은 괭이와 호미를 들고 들과 산천을 헤맸다.

삐삐 풀과 잔대는 더할 나위 없는 군것질거리였다. 내가 맡아 놓은 잔대를 누가 먼저 와서 캐 갈까 봐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양손에는 삐삐가 한 줌 양쪽 바지 주머니에는 잔대가 불룩했다. 승전장군 걸음처럼 소걸음으로 느릿느릿하게 집으로 왔다. 하나둘씩 씹어 먹으면서 인간의 기본욕구인 배고픔을 잠시나마 잊어버리고 자신의 행복감에 젖었다.

산은 우리에게 놀이터이며 먹을거리 주는 곡간이었다. 삐삐풀이며 잔대와 소나무 햇순은 보기만 해도 군침을 돌게 했다. 소나무 햇순을 꺾어 껍질 벗기고 속을 이빨로 지그시 물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속껍질을 벗겨 먹었다. 속살에서 나온 송진 냄새는 감칠맛을 더해줬다. 배고픔은 이겨낼 수 없었다. 이 설움 저 설움 해도 배고픈 설움보다 더 무서운 것 없었다.

동네 아이들과 같이 산에 소 풀 먹이러 갔다. 당시 놀이라고는 병정놀이뿐이다. 두 패로 나누어 밀리고 공격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양편 모두 얻어먹지 못해 앙상한 뼈만 가진 체구들로 서로 패하지 않으려고 땀을 비 오듯 흘러가며 숨 가쁘게 공격했다.

어느덧 해가 서산에 넘어지면서 산그늘이 서서히 내려왔다. 놀이에서 지는 편은 그날 새참 당번이었다. 산기슭 바로 그 위에는 밭들이 많았다. 주로 밀 콩 조등 다양한 밭작물을 경작했다. 대원들은 콩서리 하려고 콩밭으로 들어갔다. 몇 포기 꺾어 옷 속에 숨기고 긴 계곡 따라 숨을 헐떡거리며 몰래 가지고 왔다.

우리 중에는 나이가 지긋한 중년 되시는 분들도 있었다. 그분들은 담배 피울 때 쓰는 다항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나무 위에 콩 가지 얹고 불을 지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 따라 연기는 하느작거리며 하늘로 꼬리를 달고 날아갔다.

콩 가지가 불에 타면서 타닥타닥 소리 내며 불꽃이 하늘로 쉼 없이 올라갔다. 그럴 때마다 콩이 하나둘씩 불 밖으로 튀어나왔다. 숯불 언저리에 있는 콩을 쥐는 손은 검다 못해 시커멓게 되어버렸다. 손과 입가에는 시커멓고 얼굴은 온통 그을음으로 뒤덮어 썼으나 따스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가난 탓에 속옷도 입지 못하고 겉옷만 걸치고 다녔던 또래도 많았다. 흘러내리는 코를 연신 들이마시며 불알이 바지 밖으로 튀어나와도 개의치 않고 시커먼 손으로 콩 집어 먹는데 정신이 빠졌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웃지도 않고 자연스레 지나쳐버렸다.

손이며 입과 얼굴 모두 숯검정처럼 해서 빙~둘러앉아 서로 손짓하며 함박웃음을 지으며 맛있게 먹었다. 까맣게 타버린 콩 한 톨이라도 더 먹겠다고 말없이 설쳐대는 모습은 진정 삶의 길을 찾아가는 우리의 참모습이었다.

큰 냇물에 멱 감으러 갔다. 얼마쯤 가다 보니 당근밭이 보였다. 한 녀석이 저것 먹으면 맛있다 하며 서리 한 번 하자고 말했다. 모두 좋다 하며 살금살금 기어 당근밭으로 숨어들어 갔다. 주인이 먼발치에서 우리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뒤따라왔다.

한 친구가 붙들렸다. 그 주인은 다름 아닌 친구 아버지였다. 주인이 너 집에 가자며 팔을 잡아당겼다. 친구는 잘못했다 하며 엉덩이를 뒤로 빼고 무사히 빠져나왔다. 우리는 그 일이 시끄럽지 않고 조용히 잘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밭 주인이 학교에 와서 담임선생님한테 일러바쳤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갔다. 담임선생님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누구누구 이름 부르며 모두 교무실로 따라오라 했다. 교무실에 들어서자 교무실 안에 있던 선생님들이 쭉 둘러서서 한마디씩 했다.

못된 짓만 골라서 하던 놈들이 바로 이놈들이구나 하며 손가락질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며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시 감자와 호박은 배고픔을 달래주는 좋은 간식거리 중 하나이었다. 큼직한 돌을 양편에 세우고 그 위에 얇은 돌을 얻어서 나뭇잎을 깔고 그 위에 감자 호박을 얹고 나뭇가지로 덮는다. 불을 지피면 불에 달은 돌에 감자 호박은 알맞게 푹 익는다.

얼마 뒤에 나뭇가지를 벗겨내고 잘 익은 호박을 꺼냈다. 호박이 너무 뜨거워 입천장이 벗겨졌어도 부지런히 먹으며 배를 채웠다. 간식거리가 없었던 시절 감자 콩 호박 밀 서리는 꿀맛보다 더 맛있었다.

사람 목숨은 참으로 모질다 했다. 헐벗고 먹을 것 하나 없는 어려움 속에서 개도 먹지 않는 보리 개떡과 더불어 살아왔다. 소나무 껍질과 삐삐와 잔대는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간식거리였다.

콩과 밀 서리는 어찌 보면 큰 죄임에도 불구하고 관대히 용서해 주신 어른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오직 살아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버티며 지내온 나날들을 생각했다. 참으로 눈물겹고 한 맺힌 설움이 얼마나 많았던지 생각조차 하기도 싫다. 그런데도 이해와 용서로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아왔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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