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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춘수 원장 |
ⓒ N군위신문 |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있는 대마도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보면 분명 우리의 땅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우리의 땅이 아니고 일본 땅이다. 생각할수록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부아가 나고 안타까움을 억누를 수 없었다.
경북·대구수의사회에서 대마도 역사탐방을 다녀왔다. 대마도 남쪽에 있는 이즈하라 항에 도착하면서부터 가슴에서 무언가가 뭉클했다. 시가지에는 옛 건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 순국비, 조선 통신사의 비,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 등 선조들의 영령이 살아 숨 쉬는 역사의 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 일행은 이즈하라 항에서 시가지를 십여 분 걸어서 수선사에 갔다. 깎아놓은 듯 가파른 계단을 힘들어 올라갔다. 수선사는 백제 의자왕 16년(656년)에 백제의 비구니 法明스님이 창건하였다. 1906년 면암 선생이 음식 거절로 순국한 후 나흘 동안 안치되셨던 절이다.
수선사 마당 오른쪽 몇 평 남짓한 터에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가 있다. 떨리는 손으로 비석을 어루만지면서 비문을 읽었다. 지난날 아픔과 비애를 잊은 채 묵묵히 역사의 뒤안길을 지키고 있었다.
조국의 뜨거운 피가 아직도 흐르고 있다.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조선의 한 맺힌 넋과 얼이 탄식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지하에서 메아리쳐 들려오는 것 같았다. 순간 통한의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가슴속으로 새겨만 했던 그때 그 시대를 생각해 보았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학자이며 항일투사였다. 동부승지, 공조 참판, 공조 판서 등을 지내면서 조정에 언관(言官)벼슬로 지냈다. 당백전(當百錢) 발행으로 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였다가 관직을 삭탈 당했다. ‘내 목은 자를 수 있어도 내 머리는 자를 수 없다.’ 하며 단발령에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친일매국노 처단 상소를 올렸다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 압송되었다.
을사늑약 체결 후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상소하며 항일투쟁을 호소했다. 창의토적소란 을사늑약 체결 후 조정이 불안할 때 의병을 일으켜 역적들을 토벌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1906년 전북 정읍시 태인면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 투쟁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이송되었다. 대마도 옥사에서 식음 전폐하고 74세에 순국하셨다.
시가지를 걸으면서 술을 즐기는 회원이 웃음보따리를 펴 놓았다. 해설사는 못마땅한 듯 “술은 안 마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며 경각심을 일깨운다. 그럼에도 점심을 먹고 난 뒤 이야기는 더욱 거칠어지고 불안했다. 아슬아슬한 고비를 몇 번 넘겼다.
해설사는 우리들을 조선 통신사팻말이 있는 곳으로 안내한다. 조선 통신사는 ‘역지통신’(易地通信) 즉 국서를 교환하는 외교사절단이다. 한양에서 도쿄까지 이동기간은 왕복 5개월에서 8개월 걸렸다. 통신사의 긴 노정은 단순히 정치적 외교적 의미뿐만 아니다.
문화교류를 통해서 일본사회에 많은 자극과 영향을 끼친 문화사적 의미도 있다. 통신사 파견목적은 표면적으로는 막부장군 습직(襲職)의 축하가 대부분이었다. 내면적으로는 ‘회답겸쇄환’(回答兼刷還) 이었다. 회답겸쇄환이란 국서에 대한 회답과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을 송환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초대통신사는 율정 박서생 선생이다. 율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병조 공조 이조참판을 두루 지내면서 조정에 언관벼슬로 오랫동안 지냈다. 세종 1년에 사헌부집의가 되었고 장령(掌令)인 정연과 함께 철원에 가려는 상왕을 간언하다가 의금부에 하옥되기도 했다.
후생복지와 애민중농(愛民中農)을 이념으로 삼은 율정은 세종 8년에 대사성이 되어 조선 초대통신사로 일본에 갔다.
일본에 다녀와 수차(水車)와 화폐경제 등 15가지 후생을 위한 방안을 상봉하였다. 농사기술혁신을 일으켰다. 의성 구천서원에 제향 되었으나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었다. 경북 의성군 비안면에 박서생 선생을 기리는 사적비와 기념비가 있다. 용천리에 ‘유명조선가선대부이조참판율정박서생사적비’(有明朝鮮嘉善大夫吏曹參判栗亭朴瑞生事蹟碑)가 있고 병산정 앞에는‘조선초대통신사율정박선생기념비’(朝鮮初代通信使栗亭朴先生記念碑)가 있다. 우리들은 쉴 사이 없이 걷고 또 걷고 했다.
팔번궁 신사에 들렸다. 팔번궁 신사는 일본 무인의 수호신으로 어부와 전사의 신을 모셔 놓은 곳이다. 대마도를 대표하는 신사이며 최익현 선생이 일본군에 의해 압송되어 구금된 장소이기도 하다. 허기가 몰려오고 다리와 허리가 쑤시려고 들썩인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하모니를 이루어도 괜찮은 척하면서 열심히 해설사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팔번궁 신사 입구에는 돌기둥 양쪽에 금줄이 건너질러 매달려있다. 이것을 토리이라 한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아기를 낳고 뭇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삽짝문 위에 걸쳐놓은 건구새끼와 같았다. 팔번궁 신사 앞 양쪽에 고마이누상 두 마리가 있다. ‘고마’는 고려의 뜻이고 ‘이누’는 일본어로 개(犬)이다. 고려 개가 어찌 신선한 신사 앞에 입을 딱 벌리고 앉아있는지 궁금했다. 일본 ‘아키타’ 개도 있는데 고려 개를 앞에다 앉혀놓은 이유가 궁금했다.
천년의 풍상을 견디어온 고목 한그루가 커다란 바위 위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자연적으로 자라났든지 아니면 누군가 기념으로 심었든지 알 수가 없다. 나무 아래에는 조그마한 두 개의 신사가 있다. 먼저 도착한 어떤 회원은 이 신사가 우리나라 절 인양 착각하고 양손을 합장하고 허리를 굽혀 꾸벅꾸벅 절을 하고 있다.
해설사가 황급히 뛰어와 절을 못하게 한다. “이 신사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 사람들을 참혹하게 죽이고 코와 귀를 잘라 소금에 절려 여기에 쌓아 두었던 장소입니다”라고 해설사가 설명한다.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충성이라도 하듯 머리를 조아리며 고개 숙여 절한다. 겉으로 말 할 수 없었지만 속이 부글부글 끊었다. 가끔 농담으로 무지는 용감하다 하지만 이것은 아니었다.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치욕적이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항일정신을 심어주었다. 율정 박서생 선생은 회답겸쇄환을 통해 우리의 주권을 지켜주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임진왜란 당시 쇄환문제와 일제강점기 위안부 문제를 매듭짓지 못하고 있다.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는 것이다. 이기려면 강해야 한다. 승자의 기록이 곧 정의가 되는 세상이다. 책임을 통감하면서 하루빨리 강하고 힘 있는 나라가 되기를 염원했다.
역사에 밝지 못해 뜻밖의 복병도 많았다. 나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경북·대구 수의사회장과 임원 여러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