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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정유년 윤달을 맞이한 소회(所懷)

admin 기자 입력 2017.08.01 23:51 수정 2017.08.01 11:51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활활 타는 한여름이다. 정유년 윤오월 그믐날, 중복이다. 오늘밤 자정이면 정유년 윤달은 어디론가 바람같이 사라질 것이다.

나는 삼사십년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묏자리를 가까운 부산공원묘지에 모셨다. 살면서 가슴이 답답할 땐 부모님 잠들고 계시는 묘지를 수시로 찾았다. 그때마다 묘지의 풍경은 한없이 적요한 침묵만이 흘렀다. 부모님 잠든 무덤에는 부모님의 아스라한 흔적만 땅에 묻혀 수십 년을 뜨거운 태양과 비, 바람을 묵묵히 견딘 영혼의 적막함이 깃들어 있어 묘지를 찾을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 졌다.

삼사십년 된 묘지가 근래 십여 년 전부터 세월의 무게를 못 이겨 봉분(封墳)이 조금씩 내려앉고 꺼지기 시작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묘지 관리인에게 부탁해 손은 봤으나 임시처방, 땜질에 불과했다. 예부터 “산소는 나뭇가지하나라도 함부로 손대지 말라.”해서 전전긍긍(戰戰兢兢) 앓기만 했다. 여름 장마철만 들면 밤새라도 꺼지지나 않았는지, 봄이면 언 땅이 녹으면서 또 어찌 되었을라 불안한 십 여 년을 보냈다.

고심 끝에 부모님 묘를 이장(移葬)하기로 하고 2,3년 물색하다 반듯한 가족 묘지를 마련했다. 주산(主山)에서 바라 본 안산(案山)이 나지막해 앞이 환하고 햇볕 끝에 멀리 보이는 조산(朝山)도 수려하니 북망산(北邙山) 못 지 않은 부산추모공원을 택한 것이 잘 한 것으로 여긴다.

세계적인 공동묘지가 북망산이라 한다. 북망산은 중국의 중원(中原)인 하남성에 있다. 북망산은 좌천용 우백호가 있는 산악지형이 아니다. 묘지는 강 건너 북쪽에 있어야 한다는 게 오행사상의 전통이다. 강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거처를 구분해 주는 경계선이다. 가정에서 제례를 차릴 때도 제상을 북쪽으로 두는 이유도 이런 맥락인 것 같다.

이제 이장하는 일만 남았다. 좋은 날 윤달에 이장 운(運) 맞춰 묘지 마련하랴 이래저래 칠년 쯤 지났다. 산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금방 거처를 옮길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의 음택(陰宅)을 이장한다는 게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윤달 든 해 정유년 윤달을 기다렸든 거다.
윤달에는 “하늘과 땅의 신(神)이 사람에 대한 감시를 쉬기 때문에 궂은일을 해도 탈이 없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손이 없는 달로 불리는 윤달에 개장(改葬), 이장, 수의(壽衣)를 미리 지어 놓는 풍습이 전해져 오고 있다.

나는 아마추어 풍수지리사, 지관이다. 오십대에 부산교육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생활 풍수지리학을 수강하고 받은 풍수지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생활 풍수지리학이란 바람, 물, 땅과 인간이 생활공간에서 어울리는 이치를 조명하는 인문학이다. 명색이 풍수인데도 반풍수 집안 망 할까봐 풍수 행세를 한적 없다. 그러나 함께 수련한 친구는 훌륭한 풍수가 되어 전업으로 활동하기에 이장 할 날을 부탁해 택일도 받았고 여타 도움도 많이 받았다.

이장하든 날 이른 아침에 제례하고 파묘를 해 부모님 유골을 상봉하다니 몹시 두근거렸다. 개장 30분 지나서부터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골에 묻은 혼백이라도 다칠까 고이고이 세심하게 유골을 수습해 입관도 마쳤다. 화장장으로 옮길 때는 영혼과 영적 내통도 할 수 없어 가슴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사람의 삶이 중요한 만큼 죽음도 승고하다.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게 한국인의 전통적인 사생관(死生觀)인 것 같다. 사람이 죽는 순간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뼈에 남는다고 생각해서인지 죽은 후에도 조상의 묏자리를 명당에 모시려고 하는 것은 자손들의 화합과 번영을 바라서 인 것 같다. 왜냐면 뼈는 조상과 후손을 연결하는 고리로 생각해서 혹여 고리가 끊길까 염려해서 화장을 꺼리는 것 같다.

한국장례문화진흥원에 따르면 금년 3월 잠정 집계로 화장률이 83.4%에 이른다고 하니 우리 국민들의 장례문화의식이 많이 바뀐 듯하다. 화장함으로써 조상과 비록 연결 고리가 끊긴다고는 하나 화장은 후손에게 해도 없고 득도 없다고 한다. 산 사람끼리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 않든가. 이치가 같은 것 같다. 어떻든 이장을 무탈하게 마치고 나니 만 가지 시름을 놓은 듯하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살다 죽을 땐 빈손으로 떠난다. 인생은 일장춘몽이라 들어 마신 숨조차도 다 토하지도 못하고 눈감고 가는 길에 입고 갈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하지 않던가. 지금 사는 삶 도 죽음을 향한 여정이란 걸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성싶다. 윤달 수의를 미리 지으면 좋다는 신문 광고를 봤다. 몇 백 만 원이라니 엄청나다. 삼베 수의라서 배짱인가.

전통장례에서 수의는 생전에 입던 옷 중 가장 좋은 옷을 썼던 것 같다. 명주나 무명옷으로. 그러든 것이 1934년 조선총독부가 의례준칙을 통해 “장례식은 특수한 사정이 없는 한 5일 이내 한다.”는 규칙을 발표하면서 지금처럼 3일장이 자리 잡게 된 것 같다.

또 비단이나 명주수의를 금지하고 삼베수의를 강제로 쓰도록 하면서 전통수의가 변질된 것 같다. 전토장례에서 부모님 여위면 죄인이라는 뜻으로 상주(喪主)가 입던 삼베 상복을 고인에게 삼베수의를 입게 해 장례문화를 일제 때 격하 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나도 언젠가 북망산천 갈 적엔 평소 즐겨 입던 양복 하나 걸치고 갈 거야.
정유년 윤 오월아! 언제 또 만나랴.

황성창 시인 재부군위군향우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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