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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유불급(過猶不及)

admin 기자 입력 2017.08.01 23:54 수정 2017.08.01 11:54

난과 돌의 美學… 이성보 작가 에세이 연재

↑↑ 이성보 작가
ⓒ N군위신문
전남 해남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L씨는 올해 서른 아홉 살의 애란인이다.
10년 남짓한 사이 자생란 때문에 그가 맛본 신산(辛酸)은 우리를 숙연케 하고 있으며, 무언가를 느끼게 하고 있다.

아편과도 같이 한번 마음을 사로잡으면 참담한 지경을 당하지 않고는 결코 놓을 수 없는 난의 속성을 알만 한 사람은 다 안다.

어느 날 석가가 제자와 함께 기사굴산에 갔다 되돌아오면서 길에 떨어진 향내 나는 종이 한 장과 비린내가 나는 새끼 한 가닥을 두고, “사람은 원래가 깨끗한 것이로되 인연에 따라 죄와 복을 부르게 되는 것으로, 어진 이를 가까이 하면 도덕과 의리가 높아지고, 어리석은 이를 가까이하면 재앙과 죄에 이르게 된다.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꿴 새끼줄에서는 비린내가 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물들어 그것을 익히지마는 스스로 그렇게 되는 줄을 모를 뿐이다”라고 설법했다.

이렇듯 같은 난이라 할지라도 사람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가 있다. 난으로 인하여 인생을 보람 있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난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L씨가 1980년 12월 경 제주전화국 근무 당시 전화고장 수리차 방문한 어느 집에서 활짝 개화한 제주한란을 보게 되었다. 그로서는 난과의 첫 대면이다. 한란의 꽃만 보았다면 난에 빠져들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련만 향기까지 맡아 보았으니…. 이를 두고 ‘운명’이란 표현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청아한 한란의 향기에 매료된 L씨는 기회가 닿는 대로 난을 길러보리라 다짐했다.
수소문 끝에 난을 수십 분 기르고 있는 동료직원을 알아내었다. 그 직원으로부터 한란을 한 분 구입하였다. 난생 처음으로 난을 소유하게 되어 기뻐했으나 뉘 알았으랴 그것이 불행의 씨앗인줄을, 결과를 먼저 말하자면 한 분의 한란은 어쩌면 환란(患亂) 한 덩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로부터 일 년 뒤 L씨는 고향인 전남 해남으로 전보발령을 받았다.
해남은 자생란의 산지다. 난을 기르고 싶어 동지를 찾던 끝에 분재에 열을 올리고 있는 동료에게 난을 같이 해보자고 권유하여 보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는 혼자 산채를 하기에 이르렀다.

전문서적은 물론 선배도 없는 터라 난 잎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무늬가 있는 것은 모조리 캐다가 심어 두었다. 난에 관한 상식으로는 제주에서 귀동냥한 ‘잎에 이상한 무늬가 있으면 귀한 것이다’는 것이 전부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토요일 오후의 휴일엔 어김없이 산채길에 올랐다. 난에 미친 후로는 머릿속이 온통 난으로만 꽉 차버려 아내와 자식이 안중에 없었다. 덜덜거리는 90CC 오토바이에 인생의 전부를 싣고 빨빨대며 난을 찾아 싸돌아 다녔다.

그러기를 몇 해가 지나자 난에 대한 서적도 구입해서 읽게 되었고 난에 대한 안목도 조금 높일 수 있었다. 주위에서 난을 해 보겠다는 사람들도 한두 명씩 늘어났으며, 1985년경에는 해남에도 해일난원이 문을 여는 등 상황이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난 가게에 자주 드나들다 Y라는 난의 선배를 한 분 알게 되었다. 실은 고향 후배이긴 하지만 일찍 함평에서 난을 배웠는지 모르겠으나 난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 그에게서 난을 선별하는 법, 난의 종류, 재배기술 등 다각적인 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더욱 난에 빠지게 되었으며, 제법 고가의 난도 구입하기 시작했다.

1987년 2월이었다. 아내가 담석증으로 광주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간호차 며칠 동안 집을 비운 사이에 난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그로서는 첫 번째 재앙이었다. 7년여에 걸쳐 모아놓은 난 중에서 가장 아끼는 40여 분이 없어진 것이었다. 도난당한 난 중에는 중투와 호가 17분이나 되었으니 그 낭패감이란 어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충격으로 며칠간 식음을 전폐했다.

이 일로 인하여 난에 대하여 회의를 느낀 나머지 난을 기르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일 년 여 산채를 가지 않고 직장과 가정에 충실했다. 난을 그만 두다시피 하여 얻은 모처럼의 평온이 다시 노도(怒濤)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은 Y후배가 찾아와 난을 다시 해보라고 살살 불을 지피면서부터였다. 난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한 때문인지 계속되는 그의 꼬득임에 함몰하고 말았다. 기왕 다시 시작하는 김에 오토바이도 125CC로 바꾸는 등 마음을 다져 먹었다. 전보다 더 열심히 산채에 매달렸다. 그 무렵 자생란의 붐은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난상인이나 애란인 할 것 없이 모두가 열정적이었다.

자생란은 다른 동양란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기가 치솟아 좋은 산채품은 눈 깜빡 할 사이에 없어지곤 할 때였다. 난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것을 보니 난에다 투자를 해보는 것도 상당히 영양가 있는 일 같이 여겨졌다.

생활비, 적금, 곗돈 등 적지 않은 돈을 자생란 구입하는데 쓸어 넣었다. 남들이 알면 골빈 놈이라고 욕하겠지만 그 당신엔 그 어떤 구실도 난을 향한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없었다. 이를 두고 좋게 말하면 난에 대한 대단한 열정이라 하겠고, 나쁘게 말하면 난에 미쳐도 더럽게 미쳤다고 하리라. 나중에 돈이 모자라 해남 읍내에 있던 100여 평의 땅까지 처분하여 난을 사 모았다.

곗돈은 물론 생활비까지 주지 않자 아내의 성화도 만만치 않았으나 그래도 퍽이나 남편을 이해하려 들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 무렵 광주의 K선생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 알지도 못하는 그를 만날 이유가 없었다. 약속 장소에 나간 후에야 만나자는 이유가 바로 얼마 전 해남에서 있는 두 번의 난 도난사건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건에 L씨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좋지 않은 소문이 아래지방에서는 퍼져 있었으나, 정작 L씨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재수가 없을라치면 뒤로 자빠져도 코 깬다고 하더니 가뜩이나 지난날 자신이 난 도난을 당하여 신경이 날카로운데 억울한 누명까지 쓰고 보니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사필귀정이라 하지 않던가. 뒷날 L씨는 전혀 관계가 없음이 밝혀지긴 하였지만, 성실 하나로 살아온 그가 도둑의 누명을 쓴 것은 대단한 충격이었으며, 두 번째의 재앙이었다.

1989년도엔 그럭저럭 산채도 하고 구입도 하여 모은 난이 어림잡아 500여 분을 헤아리게 되었다. 많은 난을 소장하게 되자 날이면 날마다 난 때문에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비로소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다 보니 자신이 유명인사가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들기도 했다.

경기도 성남에 사는 J선생도 난 때문에 알게 되어 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J선생은 난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고 난을 보는 안목도 대단하여 품종에 대한 정확한 구분설명 등 그를 알고부터 안개가 걷히듯이 평소의 의문사항들이 풀리는 것이었다.

그가 난실의 월동용으로 석유난로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는 “좋은 난이 이렇게 많은데 석유난로가 웬말이냐”며 다른 난방시설을 하라고 권유하는 통에 가스난로로 대체키로 하였다.

가스난로를 구입하여 설치를 하려는데 공교롭게도 난이 들어왔다는 연락이 있어 500만 원 가까이 구입하고는, 기아자동차 대리점으로 캐피탈승용차를 계약하러 나서게 되었다.

승용차의 계약서를 막 작성하려는데 여덟 살 난 큰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난실에 불이 났다는 것이었다. 계약서도 팽개치고 단숨에 달려가 보니 ‘맙소사’ 카시미론과 비닐을 3중으로 씌운 난실은 이미 다 타버리고 난 잎은 열기를 견디지 못하여 마른 갈대잎 같이 누렇게 변해 있었다. 한두 분이 아닌 500여 분의 난들이 전부 말이다.

석유난로의 파열로 인하여 발생한 화재였으며, 세 번째의 재앙이었다. 그날 사온 가스난로부터 설치하고 나갔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으련만 하루를 미룬 것이 화근이 될 줄을 꿈엔들 생각했으랴. 화재와 함께 타버린 푸른 꿈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쥐어뜯었으나 무슨 소용이겠는가.

불을 끄느라 얼굴과 온몸이 시커멓게 변해버린 아내를 보다말고 넋을 잃고는 그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잘난 난을 한답시고 생활비도 주지 않는 남편이련만 오는 손님을 일일이 웃음으로 차 대접을 해온 아내였다. 자그마치 난을 구입하는데 들어간 비용이 현금으로만 8,700여만 원이나 되었다. 그에겐 생을 걸다시피한 일이었으니 그 낭패감, 그 허무함을 어디다 견주랴.

난에 과욕을 부린 자신의 어리석음을 벽에 머리를 찧어가며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죽은 자식 자지 만지기였으니 운명이라 체념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회한 속에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고 나서 미련과 아쉬움을 깨끗이 떨쳐 버리고 아내와 자식을 위해서 어금니를 사려 물기로 했다.

우선 집을 처분하기로 했다. 앞마당에 있는 불탄 난실을 볼 때마다 치뻗는 울화통을 삭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사라도 가면 살 것 같았다.

집을 처분한 돈으로 딴 곳에다 집을 다시 지었다. 모자라는 돈은 부친의 도움을 받았다. 그래도 너무나 좋아했던 난이라 완전히 손을 땔 수가 없어 한 켠에다 샷시로 난실도 지었다. 열심히 살아가는 덕분인지 1년여 만에 다시 100분 정도의 난을 모을 수 있었다. 빼어난 명품은 없어도 꽤 쓸 만한 것들이었다. 이제는 욕심을 내지 않고 취미로만 난을 하리라 열두 번도 더 다짐을 했다.

그러나 불행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아침 난실을 열고 보니 난실이 또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난실 바닥에 비스듬히 뚫어둔 배수구멍으로 들어온 쥐가 일을 벌였다.

똥물에 튀겨죽일 쥐새끼가 40여 분의 난을 온통 짓이겨 놓았으니 ‘환장’이란 말 밖에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로서는 네 번째의 재앙이었다.

어린아이 배꼽에 붙어있는 밥풀을 떼어먹지 도둑에, 화재에, 그 난리를 치룬 L씨의 난들을, 그것도 하필이면 한쪽으로 모아둔 쓸 만한 난만 골라 벌브까지 먹어 치웠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중에는 불더미에서 건진 단 한 분의 난까지 있었으니 다한 말이었다.

캐피탈에서 프라이드로 바뀐 승용차의 옆자리에 집사람을 태우고 소나무가 거의 없는 해남의 산들을 바라보며 대흥사를 한 바퀴 둘러 온다는 L선생, 난은 잃었지만 건강은 잃지 않았다고 웃음 짓는 L선생의 난과 더불은 10년 세월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기에 씁쓰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매를 맞아도 먼저 맞는 게 좋다고 했다. 젊어 치룬 홍역이기에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를 일이다.

노래에 재질이 많은 그의 아내는 남편 덕으로 해외여행은 이미 싹수가 노랗기에 주부가요열창에 나가 1등을 하여 남편과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게 꿈이라며 노래연습에 한창이란다.

이젠 담담히 난실의 난을 돌보면서 어려웠을 때 격려와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해주셨던 분들께 감사함을 전하며, 오는 손님마다 따뜻이 대해준 집사람에게 미안할 따름이라는 L선생, 다시는 후회 없는 취미생활을 하리라는 그의 다짐이 어두운 여운을 남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그렇다. 모든 일이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을지니….

글쓴이: 이성보
-저서 : 「난향이 머무는 곳에도」,「석향에 취한 오후」, 「난에게 길을 물어」,「세상인심과 사람의 향기」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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