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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느지막한 여름 끝자락에서

admin 기자 입력 2017.09.01 09:14 수정 2017.09.01 09:14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기상 해설자가 실시간으로 일기예보를 한다. 전국이 38℃를 오르내리며 불볕더위가 계속된다고 주의를 당부한다. 밭에서 일하던 노인이 쓰려졌다. 산과 계곡에는 더위를 피하려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이다. 고속도로는 더위를 탈출하려는 피서객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마치 전국이 뜨거운 가마솥에 빠진 것 같다. 내 곁에 있던 봄은 떠났지만, 여름은 끝자락에서 분주히 떠드는 난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슬픈 사연만 남겨놓은 채 떠날 채비만 한다.

국정농단으로 한 시대를 마감했던 봄, 찜통 속에서 조류인플루엔자와 사투를 벌이며 힘들었던 여름, 흔적만 남겨놓고 우리 곁에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12장 달력이 쓸데없는 세상사에 온 힘을 다 써버리고, 겨우 4장만 달랑 달아서 바람에 흐느적거리고 있다. 그런데도 눈곱보다도 작은 여력으로 아침마다 눈 맞춤하며 하루의 희망을 주곤 한다.

올여름은 살인 더위였다. 밖 온도가 38℃ 되었으니 사람 체온보다 무려 2℃나 더 높았다. 숨을 쉬려고 콧구멍을 실룩거리며 들이마셔 보아도, 뜨거운 공기가 숨을 막아 죽을 것만 같았다. 애꿎은 에어컨과 씨름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다. 불볕더위가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지만, 무엇이 아쉬운지 쉬 가지 않고 그 자리에 맴돌며 머뭇거리고 있다. 지긋지긋한 여름, 생각만 해도 몸서리 치인다.

손바닥만 한 밭뙈기에 자두나무 몇 그루 있다. 지난해는 농사를 옳게 짓지 못해 망쳐버렸다. 올해는 이른 봄부터 준비를 단단히 했다. 거름을 듬뿍 주고 비료도 알맞게 주었다. 가지치기와 열매 솎음도 매끈하게 잘했다. 병충해 방제를 위해 살균제와 살충제 살포도 시기에 맞추어서 했다. 영양제도 수시로 뿌려주며 알뜰살뜰 보살폈다.

나무 밑에 잡초가 많이 자랐을 때도 밭에 농약이 오염될까 봐 예초기로 풀을 베었다. 애지중지 키우는 동안 나뭇가지는 줄기차게 주~ 욱 뻗어 나갔다. 나뭇잎들은 검푸른 색으로 반지르르했다. 콩만 하던 열매도 하루가 다르게 굵어지기 시작한다. 어쩜 올 농사는 잘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나뭇잎들이 하룻밤 사이에 누르스름하게 변해 버렸다. 나뭇가지들은 힘없이 축 늘어지고, 탱글탱글하던 열매는 바람 빠진 고무풍선처럼 쪼그려졌다.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에 견디다 못한 나무는 불에 탄 것처럼 불그스름해 버렸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그날따라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은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내 마음을 더욱 쓰라리게 했다.

허름한 옷이 땀에 뒤범벅되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연상 물에 빠진 생쥐 같았다. 가까스로 원인을 찾았다. 무엇이든 원인을 알고 나면 초조하고 당황했던 마음이 이내 편안해진다. 건조한 날씨가 이어져 가뭄으로 일어난 한발이 원인이었다.

급히 서둘렀다. 수중 모터와 호스를 깔고 전원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았다. 금세 물은 정신없이 펑펑 솟아올랐다. 나무들은 갈증 난 목을 쭉 빼고 물을 마시느라 정신이 없다. 나무에 앉은 먼지를 깨끗이 씻겨주었다. 나무는 ‘휴~ 살았다’ 하며 시들어진 잎들이 금방 파릇파릇해졌다. 쭈글쭈글하던 열매도 탱글탱글해졌다.

그늘막 없이 햇볕에 그냥 노출되어있는 나무를 유심히 쳐다본다. 올망졸망 매달린 열매를 굵게 키우느라 고생이 얼마나 많았을까, 더운 날씨에 목이 얼마나 탓을 까, 그런데도 휘어진 어린 가지에 매달린 열매가 떨어질까 고심하며 붙들고 있는 나무의 애정을 보면서 연민의 정이 절로 든다. 이런저런 생각에 나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끊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하지 못한 아쉬웠던 일 빠뜨림 없이 챙겨주고 싶었다.

느지막한 여름 끝자락에서 땀 흘리며 애써 가꾼 자두를 수확한다. 얼굴에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사다리 위에 올라가 열매를 딴다. 탐스럽게 열린 자두 하나씩 딸 때마다 마음이 뭉클했다. 올 같은 무더위도 열매를 맺어준 나무에게 고맙다고 생각했다.

열매를 바구니에 수북이 담아 각처에서 찾아온 친구들과 맛과 색과 크기를 견주어 보는 청과상회로 갔다. 고슴도치처럼 자기 물건이 제일 좋아 보였다. 경매가 끝난 다음 가격표를 보았다. 꼴찌가 아니었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상회에서 준 얄팍한 봉투를 받았다. 봉투를 뜯어보지 않고 땀에 찌든 겉옷 주머니에 고이 넣었다. 일 년 동안 땀 흘리면 애써 가꾼 자두를 팔았던 돈이라고 하며 마누라에게 주고 싶었다. 그런데도 마누라는 시큰 둥 했다. 마누라는 내가 땀 흘리며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돈 필요 없으니 일하지 말라 하는 소리가 노래 같았다. 그런데도 하고픈 마음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마누라에게 돈 봉투를 내밀 때 그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돈 봉투가 두툼하지 못한 사연은 애꿎은 날씨 탓으로 돌리고 내년에는 더 크고 좋고 맛난 과일을 만들고 싶었다. 이 이야기를 여럿이 앞에서 늘어놓았다. 농사짓는 사람이라면 이맘때가 되면 모두 자네와 같은 생각을 하네. 올해 농사를 잘못 지었으면 내년에는 더 잘 지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속으면서도 짓는 것이 농사이네 하며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친다.

그런데도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고생한 나무에 대한 위로와 감사의 뜻으로 보너스를 주어야 했다. 한 나무 한 나무씩 살펴보았다. 잎이 시들해져 있는 나무를 보았다. 나무 밑을 내려다보니 톱밥이 수북이 쌓였다. 벌레가 나무를 갉아 먹고 내놓은 것이다.

나무껍질을 벗기다시피 해서 벌레가 숨은 곳을 찾아냈다. 그 구멍으로 살충제를 넣고 입구를 진흙으로 발랐다. 그 이튿날 확인해 보았다. 톱밥이 없었다. 나무속에 들어있던 벌레가 죽은 것으로 생각한다. 며칠 후 나뭇잎들은 생기가 돌고 윤기가 흘렀다. 죽어가든 한 나무의 생명을 구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어깨가 절로 으쓱했다.

올해 같은 무더위 또 있을까. 나무도 가축도 더위에 맥 못 추고 헉헉거렸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과일도 제대로 익은 것보다 뜨거운 햇볕에 못 견뎌 익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올 과일은 색과 맛과 과육이 어느 때보다도 덜한 것 같다. 그렇다고 자연을 미워할 수도 나무랄 수도 없다. 자연은 계절의 변화라는 순리를 잘 지키며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모든 것 내 탓이오. 내 탓이로소이다 하며 내년의 풍년을 기약하면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친다.

어느새 입추가 지나고 말복이 찾아왔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느낌이 든다. 무더위에 고생했다고 가을의 여신 귀뚜라미와 여치가 안부를 전한다. 북을 앞세우고 꽹과리 피리 장구 치는 친구들을 데리고 위문 공연하러 왔다 하며 부산을 떤다. 아! 벌써 고엽이 떨어지는 가을을 재촉하는가 보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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