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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시대를 밝힌 퇴계이황(1)

admin 기자 입력 2017.09.01 09:22 수정 2017.09.01 09:22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동양철학에서 가장 친숙하게 느끼는 철학자라면 퇴계이황선생일 것이다 퇴계이황의 철학적 사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동양철학이란 무엇인가? 한국,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인도, 그리고 아라비아까지 포함해야 되지만 우리는 이상하게도 동양철학이라 하면 중국 철학을 떠 올린다. 이 같은 편견은 일본 강점기의 영향에서 왔다.

근대시기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야욕에서 탈아입구(脫亞入毆)를 외쳤다. 탈아는 아시아 지배를 의미하였고 입구는 유럽(구라파)국가들과 대등해지겠다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첫 대상이 조선이었으며 그 다음은 중국 이었다 일본은 중국이 오랫동안 아시아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중국 지배가 곧 아시아 지배라고 생각했다.

동양을 영어로 Orient라고 하며 오리엔트의 본래 뜻은 해 뜨는 동쪽이다. 그 기준은 유럽인이 유럽 땅에서 바라보는 것이므로 해 뜨는 동쪽은 곧 이슬람 문화권이었다. 그 뒤 항해가 발달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중국, 한국, 일본까지가 모두 오리엔트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동양철학이라 하면 인도나 이슬람을 뺀 채 중국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동양학은 중국학이고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일제 강점기를 통해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동양 철학은 30년 전만 해도 골동품 취급을 받았다. 심지어 동양철학을 이름을 짓거나 점을 치고 사주를 보는 학문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양이 동양을 압도하기 시작한 근대 이후 동양철학은 죽은 철학이 되었다. 강력한 서양의 문화영향 아래 주거 형태를 바꾸고 옷이나 머리 모양을 바꾸면서 생각마저도 많이 바뀌어 갔다. 동양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단 사유체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동양철학과 전통철학이 다시 관심이 높아지고 붐이 일어나게 된 것은 1970년 후반부터 일기 시작하였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이후 버려졌던 동양철학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근대 이후 동양을 짓밟았던 서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부활인 셈이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인이 주체적으로 본 동양이 아니라 서구인들의 시각으로 보는 왜곡된 동양을 뜻한다.

오늘날 동양철학이 관심이 되는 것은 매우 복잡하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통제불능이 되어버린 거대한 공룡처럼 커져버린 자본주의가 파생시킨 도덕과 인간성 상실, 환경오염으로 대표되는 생태학적 위기에 현실의 삶이 팍팍해 지면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특히 인류 문명의 위기가 서구적 세계관에서 기인 한다는 반성적 사고가 오랜 전통 속에 녹아 있는 동양적 삶의 지혜를 돌아보게 하였다.

동양적 사고를 알기 위해서는 서양과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토양이 다르면 꽃과 열매가 달라지듯 사람도 주어진 환경에 따라 사유체계가 달라진다.
동양문화의 토대는 농경이고 서양문화의 토대는 유목이다.

일찍이 인류문명의 발생지로 지목된 황하강 유역의 중국문명,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 유역의 인도문명, 티그리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문명, 나일 강 유역의 이집트문명, 모두 오리엔트 지역의 농경문명들이다.

특히 우리가 동양문화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중국의 경우 기원전 3천년 무렵부터 2백만명으로 추정되는 당시 중국인구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100만 명 정도가 황하강 유역에서 농경으로 살았다.

이와 달리 서양문화의 중심은 유목이었다.
서양문명의 양대 축인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가운데 기독교의 출발인 헤브라이즘은 다윗이 양치기였던 것처럼 유목이 기본이었다.

그리스와 로마 문명으로 불리는 헬레니즘은 유목과 농경 해양문화가 뒤섞여 있다. 그러나 현재 서양문화의 주축을 이룬 게르만과 앵글로색슨 등은 모두 전형적인 유목이다.

특히 게르만은 유럽 전역에 걸쳐 천년 이상의 대이동을 펼친 대표적인 유목민이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삶을 꾸리는 유목문화와 한 번 땅에 정착하면 자손 대대로 그곳에 붙어 사는 농경문화의 사유방식 차이는 서양은 자연을 극복 또는 이용 대상으로 보았고 동양은 합일(合一) 대상으로 보았다. 유목은 한 곳에 머물다가도 가축들의 먹이나 사냥감이 떨어지면 신속하게 다른 곳으로 옮겨 가야 한다. 부족의 생계를 위해 작은 단위로 흩어져 살기도 하고 언제나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부족의 이동이 재빨라야 한다.

왜냐하면 새롭게 머물 곳을 빨리 찾지 못하면 부족전체가 몰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서양의 생존 환경 차이가 동양에서는 연장자 중심의 종적 관계에 기초한 대가족제로 나타났고 서양에서는 부부 중심적 횡적 관계에 기초한 소가족제로 나타났다.

동양과 서양철학의 차이를 이해했다면 조선 성리학의 선구자들 중 퇴계이황의 철학이 형성되기까지 조선사회의 전반에 어떤 변화들이 일어났는지를 알아보자.

퇴계이황 하면 먼저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왜 이분을 지폐에 넣었을까? 우리나라는 퇴계이황, 율곡이이, 세종대왕, 새로운 인물 중에는 율곡선생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들어가 있다.

사실 돈과 가장 거리가 먼 분들이 지폐에 들어 있는데 당대의 임금을 비롯해서 수많은 학자들이 퇴계이황 선생을 공경하고 그 영향을 받아서 지폐에 넣어 존경하는 마음을 품는데 왜 그런가 하면 말과 행실이 일치했기 때문인 것이다.

말과 행실 즉 언행이 일치 했다고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 한다면 물질적으로는 도움이 되질 않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어떨까.

참선비는 선현을 존경하고 자신의 마음을 닦아 가는 것이라 주장하며 몸소 실천에 옮김으로 사후 400여년이 더 흘러도 퇴계의 정신은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인본 수칙이 되어 버렸다.
퇴계이황선생의 사상과 철학을 알기 위해서는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조선 건국이 세워지기전 1392년 4월 4일 그 당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서 포은 정몽주(1337~1392)가 나중에 조선의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해 선지교(善地橋)에서 피살 된다.
정몽주가 피살되고 난 다음에 거기서 참죽나무가 자랐다 해서 나중에 선죽교(善竹橋)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 핏자국이 아직도 있다고 하는데 이후에 그곳을 지나던 사람들은 이방원의 수하라 하더라도 그 자리를 보면 숙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1392년4월 4일 정몽주가 피살되고 1392년 7월 17일 이성계가 이단(李旦)으로 개명한 후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 한다.
이성계 이름은 막 불러도 되지만 이단(李旦)은 아무나 함부로 부를 수 없다 임금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태조는 즉위 초부터 유학의 이념 중에서 덕치(德治)덕으로 천하는 다스리는 공자의 주장처럼 백성을 폭력으로 다스려서는 안 되고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웠다.

이때의 민은 대부분 농민이었다.
농사를 짓는 민을 폭력으로 다스려서는 안 되는 이유가 일년내내 부지런히 일을 해야 했으며 노동의 수준이 높아지고 많은 사람들이 협력을 해야 했다 덕치이념을 그대로 계승한 학자가 맹자의 왕도정치이다.

왕도라 할 때 왕은 덕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맹자는 패도정치 (覇道政治)는 폭력으로 다스리는 것으로 이력가인(以力假仁) 무력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겉으로는 인도를 행하는 양 꾸미는 것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왕도정치이념은 바로 환과고독(鰥寡孤獨) 천하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이 홀아비나 과부, 어리고 부모 없는 사람, 늙고 자식이 없는 사람들부터 먼저 혜택을 베풀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덕치이다 그래서 경복궁을 설계할 때 정문 이름이 광화문(光化門)이다.

원래 불화변에 사람인자로서 사람의 빛이다 훌륭한 인물뒤에 두광 배광의 빛이 나오듯이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정문을 광화문이라 하는 명칭은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문이다 라고 한다.

맹자는 인간 본성에 관하여 많이 이야기 한다. 인간본성은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의 본성을 사랑하는 것인데 왜 그렇게 조선중기에는 많은 사화가 일어났으며 수많은 인명을 파괴 했는지에 다음편 이황(李滉)의 혼란과 격동의 시대와 제9대 성종시대부터 훈구파와 사람파의 격렬한 대립이 있었던 네 차례의 사화를 실어 드리겠습니다.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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