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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국가 부황왕릉 찾기

admin 기자 입력 2017.09.01 09:26 수정 2017.09.01 09:26

↑↑ 홍영선 위원
ⓒ N군위신문
군위의 읍호를 노동맥, 또는 적라 라고 하는데 “赤羅”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적라지(1946)와 군위군지(1936)에서 밝히고 있다. 첫째는 “신라의 벼슬하는 사람이 이 고을에 많이 살았다. 벼슬하는 사람은 붉은 옷의 도포를 입었다. 그르나 백성은 그 옷 빛이 다름으로 구별 하였다. 또 비단은 붉었도다. (羅衣赤兮謠) 노래가 있었으니 고을 이름을 이로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둘째는 “고을 경내 적라산(一名. 韓敵山)이 있는 고로 이른다” 두 가지 설중 첫째는 民譚치고는 語不成說이고, 둘째 설은 종전 모든 地誌에서 邑號를 “적라 ” 라고 함은 “境內有赤羅山故名焉” 이라 하였고, 山川條 에는 적라산 一名 韓敵山 이라고 규장각 소장 4개 읍지를 확인하여 보아도 이상과 같이 적고 있다.

신라관인 赤衣는 “赤羅”라고 글자 풀이 할지라도 신라 관인이 군위에 많이 거주 하였다는 것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적라지나 군위군지에 처음으로 신라관인 복색에 比定함은 만약 문헌이 있었다면 典故를 기록 하였을 탠데 신빙할 근거 문헌이 없는 것 같다.

1996년 12월 군위문화원에서 적라지를 국역한 金炯俊 선생이 국역 발문을 쓰고 뒤에 「軍威邑(縣)號 에 대한 小考」에 의하면“「적라」란 이름에 대하여 적라지 이전 어느 문헌에도 ‘적라’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군위군지에 보임) 그러나 적라지 에서는 신라 때부터 칭하였다 하나 이는 필시 노동맥현 또는 군위현의 별호 인듯하다”는 기록에 동감 하면서 의흥현의 별호가 龜山 이라 함과 같은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 조 에는 군위현은 본래 “奴同覓縣(일명, 如豆覓) 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한자화로 고쳐 으니,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라고 하였다. 의성군의 경우 聞韶郡 이 義城府 로 바뀌었다.

삼한시대 辰國이 통치하는 12개 부족국 중에 하나인 汝湛國을 학계에서는 의성, 금성면과, 군위읍,으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 자치화 시대를 맞아 정체성 확립을 위하여 홍보에 진력하고 있는데 대구 수성구의 경우 『논어』의 구절을 인용 「仁者壽城」 군위의 경우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라고 홍보하고 있다.

일연禪師는 경산시에서는 三聖賢에 포함시켜 홍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근 의성군에서는 2000여년 전 ‘조문국’을 가지고 박물관을 건립 관광자원화 하고 있다.
군위도 고대국가의 흔적을 찿기 위한 전문가를 초빙 학술발표회와 향토출신 사학자를 활용 정체성 찾기에 매진하여야 한다.

그 한 예로 소보면 봉소동(하소) 봉의국교 근처 부족국인 등붕국이 조문국에 침략을 받아 봉황동(부황리)에서 왕이 붙잡혔다고 전한다. 부황왕릉은 30㎡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1977년 문화유적총람 (문화재관리국 간행)에서 관리번호 0907-30-010 관리토록 하였다. 그르나 2005년 군위군에서 용역한 『:문화유적분포지도』 (대구대 중앙박물관) 간행에는 아예 조사 표시가 없다 늦을 때가 제일 빠르다고 자치시대는 이웃한 자치단체와 비교하기 마련이다.

기관장은 안 날로 부터 문화적 자산을 보호하고 관리할 책임이 있다. 하루 속히 소재지를 찾아 표시판을 세우고 일실되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 하여 줄 것을 기대하는 바이다.

홍영선 국사편찬 위원회
사료조사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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