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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혼란의 시대를 밝힌 퇴계이황(2)

admin 기자 입력 2017.09.12 22:37 수정 2017.09.12 10:37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조선의 신진유학자들은 유교경전에 근거하여 각종 법제서를 편찬하고 문물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유교적 가치를 중심으로 나라를 운영하는 기초를 세웠는데 이들이 관학파 유학자들이다.

조선 초기 관학파 유학자들은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지만 15~16세기 시간이 흘러가면서 본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조선 초기 세조때 이후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료집단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고 성종(1457~1494)제9대왕 시대에 이르게 되면 중앙에 있던 유학자 지주 중에서 대지주(대토지소유자)는 왕과 권력을 다툴 만큼 권력이 비대해 진다.

그런 상황이 일어나게 되니까 성종은 지방 출신의 신진유학자들을 대거 등용한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정암 조광조(1482~1519)조선중기 문신이다 이런 인물들을 등용하면서 왕권을 안정시키기도 하고 기존 관료들의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로 인해 유학자들 또한 두 세력으로 나누어졌는데 기존의 관료 세력을 훈구파라 하고 신진 세력을 사람파라 한다.

사림세력은 지방에 있는 중소지주들로서 훈구대신들과 경쟁에서 어느 한 순간 사림세력이 훈구세력에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반대파 훈구세력에 의해 화(禍)를 입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50년에 걸쳐 4번의 사화가 일어난다.

혼란의 시대 중 연산군(1494~1506) 시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신예 사림 중심에 김종직이 뛰어난 문장가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쓴 적이 있다. 의제가 초나라 왕이었을 때 항우가 의제를 시해 한다.

그런데 김종직이 항우에게 시해를 당한 의제를 위로하는 글을 쓴다.
중국 고대왕조 초나라는 지금부터 한 2400년 전에 존재했던 나라이고 김종직은 1400년대 인물이다.

그런데 1400년 뒤에 중국이 아닌 조선에 태어난 김종직이 1400년 전에 초나라 임금이 죽었다고 글을 쓰는 의미는 어디 있고 슬퍼할 이유는 어디 있는가.

사실은 의제가 누구냐 하면 단종을 뜻 한다. 단종이 세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자 단종을 위로하는 글 이었다. 결국은 왕권을 비난하는 글을 쓴 셈이다

김종직이 살아 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조가 자기를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등용을 했다. 김종직의 문장이 워낙 탁월했으니까.

문제는 연산군 때 일어난다. 본래 사관이 역사를 기록하면 기록한 역사를 당시의 임금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보여주면 고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세종도 아버지 태종을 안 좋게 썼을 것 같았기 때문에 궁금하여 보려고 했지만 안 보여 주었다.

하지만 연산군은 보았기 때문에 사화가 일어났다.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일손(1464~1498)사관이 세조가 왕위를 찬탈 했다는 식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 기록을 연산군이 보고 김일손은 참수형에 처하고 김종직은 이미 죽었으니 죽일 수 가없어 부관참시를 하였다.

조선역사에서 사화라는 이름이 붙은 최초의 연산군 4년 무오사화(1498)는 퇴계가 태어나기 삼년 전에 일어나고 19살 되던 시기에 정암 조광조가 희생되는 기묘사화(1519)가 일어난다.
기묘사화라는 것도 조광조가 중종의 신임을 받아서 개혁정치를 펼치는데 조광조는 유학의 경전과 성리학에서 이야기 한데로 나라를 다스려야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그 당시 기득권층과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조광조에게는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용납되지 않았다.

그 당시 함경도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어떤 요구를 하느냐 하면 여진족이 약탈과 침략이 심해지자 여진족 수장을 잔치에 초대해서 사로잡으려는 계략을 중종 임금도 허락을 하고 병마절도사도 허락을 하였지만 조광조를 뒤 집는다.

우리 조선은 중화의 문명국이고 저들은 한갓 오랑캐 들이다. 저런 자들은 덕으로 다스려야지 그걸 무력으로 치사하게 사기를 쳐서 붙잡으려 하다니 지금 당장 효과는 있을지 모르나 장래는 화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여 요구를 아예 없애 버린다.

특히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자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유학자들이 중앙의 요직에 등용되어 훈구파의 공훈을 삭제하는 등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자 훈구파는 다시 조광조가 역모를 했다고 모함하여 기묘사화로 제거해 버리니 조광조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그를 지지했던 사림세력들은 중앙의 정치쪽으로 나아가지 않고 향촌으로 물러나서 수양에 매진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길로 나가게 되었다.

1504년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가 갑자사화이며 이황이 45세로 관직에서 한창 뻗어 나갈 때 1545년 문정왕후와 외척 윤원형 일파 소윤 세력이 득세를 하고 윤임 일파 대윤을 숙청하면서 을사사화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죽고 유배될 때 이황의 넷째형 이해(1496~1550)도 사화에 연류되어 목숨을 잃고 이황자신도 삭탈관직을 당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퇴계가 사화에 연류되기 전 서울에 올라와서는 홍문관 대제학도 하고 성균관 대사성도 했는데 모든 자리를 내어놓고 1559년 어느 봄날 벼슬을 버리고 고향 안동으로 내려와 청량산으로 들어가 은거를 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친다.

원래 유학자의 삶은 두 가지 중의 하나다 첫 번째는 출사를 해서 관리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 유학은 수기(修己)로서 나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것이다.

수기라는 게 원래 거울을 닦는다는 뜻으로 마음의 거울을 닦는 것이다 마음의 거울에 때가 끼어 있는 게 바로 욕망이다.

수기치인(修己治人)수기는 수양을 통해서 자기의 인격을 완성하고 나아가 세상 사람을 다스린다는 의미이며 치인은 다른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정치를 하는 것이다.

수기를 바탕으로 치인을 하는데 출사를 해서 관리가 되는 것이다.
그 시대를 다스리는 임금과 일치 하지 않으면 뜻을 펼칠 수가 없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관리와 은(隱)의 중간에 사림(士林)을 둔다.

지금 당장 나가서 관리가 되지는 않지만 자신의 제자를 양성함으로써 다음을 기약한다. 이 당시는 퇴계 이황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명조식(1501~1572)과 화담서경덕(1489~1546)선생들도 은거를 하면서 성리학자의 길을 갔다.

서경덕선생은 개경의 화담에 은거했다 해서 화담선생이라 불렀는데 회재이언적(1491~1553)과 함께 퇴계이황과 율곡이이에 앞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학자들이 바로 서경덕과 이언적 선생이다.

화담 서경덕은 기(氣)를 중시 했는데 이(理)보다 기를 중시하는 독자적인 기일원론을 완성한 주기론의 선구자이다. 이언적은 리(理)강조한 철학자이다.

조선시대는 과거시험을 통해서 인재를 등용하는데 서경덕 같은 학자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다. 이런 인재를 썩히는 게 나라에서는 큰 손실이 되어 추천제를 통해서 지방에서 학문적 명망이 있고 신망이 두터운 사람들을 추천하게 한다.

그 당시 127명을 추천했는데 화담 서경덕 선생이 1등으로 추천되어 벼슬할 기회가 있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고 송도에서 태어나 58세로 자신의 서재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출사하지 않고 화담에 은거 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화담 선생이라 부르며 존경 하였다.

그는 18세 때에 대학을 읽다가 사물을 궁구(窮究사리를 깊이 연구함)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대목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먼저 물(物)의 이치를 탐구하는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때부터 벽에 사물의 이름을 붙여 놓고 이치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격물(格物)은 천하의 사사물물(事事物物)에 나아가 일일이 이치를 궁구하는 과정이다.

격물치지의 과정은 현상에 대한 앎보다 현상의 배후에 있는 근원에 대한 앎을 중시한다. 또한 격물의 과정을 오래도록 지속하면 어느 날 환하게 모든 사물의 이치를 알게 된다.
그 결과 자연사물을 공부하는 다양한 방식의 연구를 내어 놓는다.

종달새가 날아다니는 현상부터 온천과 바람에 이르기 까지 여러 가지 자연현상에 대한 독창적이고 합리적인 해설을 내 놓았는데 예를 들어 온천을 설명할 때 온천은 땅에서 뜨거운 물이 나온다. 음에 속하는 물은 성질이 차가울 수밖에 없는데 온천이 뜨거운 까닭을 두고 “음기인 물을 땅속에 있는 양기가 건드렸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즉 땅속에 있는 뜨거운 양기가 물을 건드려서 끓여 오르는 것이다.
또 부채를 흔들면 바람이 발생하는 현상을 두고 “부채가 바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천지 사이에 가득한 기를 부채가 움직이게 한 것 일뿐 기가 흩어져 있을 때는 태허의 상태 즉 비어 있는 상태로 돌아간다. 태허의 상태의 있는 기를 부채가 움직임으로써 바람이 생긴다.”
부채가 바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기가 태허의 상태에 있는데 부채가 흔드므로써 그 기를 움직여서 바람이 나오는 것이다.

서경덕은 氣를 오직 자기 원인에 의해서 존재하고 운동하는 근원적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기일원론적 세계관을 수립했다.

다음호에는 퇴계 이황은 리의 철학자 회재이언적을 지지하고 율곡이이는 기의 철학자 화담서경덕의 견해를 지지하는 두 학자와 퇴계이황이 젊은 기대승 학자와 사단칠정논쟁의 발단을 실어 드리겠습니다.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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