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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추석이면 생각나는 친구

admin 기자 입력 2017.09.25 09:36 수정 2017.09.25 09:36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조상들의 슬기와 얼이 담긴 추석. 먼 곳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온다. 썰렁하던 마을이 갑자기 기쁨과 반가움이 가득하여 생기가 넘쳐흐른다.
비좁은 방에 둘러앉아 지내온 이야기를 꽃피우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모처럼 사람 사는 세상 같다.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몇 사람 앉으면 엉덩이가 대일 듯 콧구멍만 한 작은 방이 있다. 추석에 아들딸, 손자 손녀, 백년손님이 인사하러 왔다.

앉을 자리가 없어 골칫거리가 되었다. 앉아있자니 며느리 사위가 불편해 보이는 것 같고, 서 있자니 하는 일 없이 괜히 서성대는 것 같아 보여 하는 수 없이 썰물처럼 밖으로 떠밀려 나와야 했다. 방안에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웃음꽃이 피어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는다. 뒷맛이 씁쓰레 하며 개운치 않았다.

명절이면 으레 자식 자랑하는 친구 아버지가 있다. 입에 긴 담뱃대를 비스듬히 물고 양손을 뒤로 한 채, 어슬렁거리며 팔자걸음으로 할 일 없이 이집 저집 다닌다.

서울에 있는 큰아들 녀석이 보약 한재 지어 왔더라 하고서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쯤 지난 후 또다시 나와 대구에 있는 둘째 아들 녀석이 사과 한 상자 사 들고 왔다. 부산에 있는 셋째 아들 녀석이 횟(膾)거리 한 상자 들고 왔다 하며 동네방네 자랑하기가 일쑤였다.

우리 아버지는 친구 아버지처럼 이야기를 재미있게 할 줄 모른다. 아들딸들이 찾아왔어도 그냥 반기며 마음속으로 반갑고 좋아할 뿐이다. 말을 하지 않고 있으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먼 곳에서 오느라 고생했다 하며 서둘러 밥상을 차린다.
자식들은 밥상 앞에 둘러앉아 정치, 경제, 문화와 세상이 돌아가는 인생사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열변을 토하듯 자기 주위에서 일어났던 세세한 사건들의 이야기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농촌에는 명절에 계(契) 모임이 많다. 부모님들이 한동네에 살면서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들을 위해 계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올해는 내가 주관하여 모임을 했다.

서울·부산 대구 각처에서 온 친구들과 고향을 지키고 있는 친구들이 수십 명 되었다.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왔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식순에 따라 행사를 마쳤다.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배고픈 줄 모르고 자기가 사는 곳에서 일어난 이야기에 정신없다. 식사 후 오랜만에 만났다하며 노래방에 가자했다.

노래 솜씨는 여전했다. 아직도 녹슬지 않고 옛날 그대로이다. 하도 같잖아 말했다. 밥 먹고 할 일없어 노래방에만 다녔느냐? 나이가 들면 좀 시들어질 줄도 알아야 한다. 어찌 젊었을 때보다 노래를 더 잘 부르느냐 하며 농담 섞인 말로 한마디 건넸다. 시간이 갈수록 노래방의 열기는 용광로보다 더 활활 타올랐다.

너무나 즐거웠고 행복했다. 이 밤이 새도록 놀다 가고 싶었다. 이 순간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 일어났다. 행복했던 순간들이 순식간에 산산이 조각이 나버렸다. 어디선지 난데없던 맥주병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뛰어가 보았다. 먼 데서 온 친구가 만취되어 인사불성이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버린 지가 오래였고 옷은 술에 뒤범벅되었다. 화가 저절로 치밀어 올라와 견딜 수 없었다. 그곳 술버릇이 농촌 골짜기 술버릇보다 나은 것 하나도 더 없다. 사람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술을 퍼먹고, 컵 던지고, 술상 뒤엎는 짓 누군들 못하나? 모두 참는다는 것뿐이다. 속도 상하고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마음을 다독이며 진정시켰다. 이 세상에는 친구보다 더 소중한 것 없다. 라고 했다. 모든 것 용서하고 다음 모임 때에는 좀 더 세련되고 우아하고 성숙된 모습으로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내년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얼마 후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당시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한다는 말 한마디 하고 끊겼다. 더 통화하고 싶었던데 친구한테 피해가 될까 끊었다.

며칠이 지났다. 슬픈 소식이 들렸다. 술에 만취되어 즐겁게 놀지도 못했던 그 친구가 아쉽게도 아주 먼 길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허전함과 허탈함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일순간 나를 슬픔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생전에 좀 더 잘 해줄 걸, 왜 진작 몰랐을까? 후회스러운 마음으로 친구를 생각하며 명복을 빌었다.

추적추적 비 오는 어느 날, 말없이 내 곁을 떠난 그 친구 생각이 났다. 뚜벅뚜벅 한 걸음으로 길 따라 그 집을 찾았다. 아직도 그가 앉았던 의자며 식탁은 쓸쓸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떨리는 가슴으로 자리를 더듬거리며 만져보았다. 따뜻한 온기는 온데간데없다. 친구가 앉아 있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해 본다. 젊음은 잠시뿐인 걸 가지고 무엇이 그렇게도 유세를 부렸든가 하고 생각했다.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우리는 살면서 날마다 자기만의 역사를 쓰고 있다. 내 곁을 홀연히 떠난 친구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천상친구들과 어울려 한잔하면서 더없이 즐겁게 놀고 있을지도 모른다. 추석이 되면 그 친구가 생각난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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