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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시대를 밝힌 퇴계이황(3)

admin 기자 입력 2017.10.09 22:12 수정 2017.10.09 10:12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회재 이언적은 평생 은거했던 서경덕과는 달리 25세 때부터 적극적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사관으로 재직할 때부터 권신들의 배척을 받아 쫓겨났다가 복귀 하는 등 정치적으로 여러차례 부침을 겪었다. 더욱이 말년에는 권신 윤원형 일파의 미움을 받아 강계로 유배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유배 기간 학문에 전념하여 다수의 중요한 저술을 내어 놓았다. 이언적이 학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무극태극논쟁을 제기하여 이 시대부터 논쟁의 시대가 된다. 무극태극 논쟁은 이언적이 손숙돈, 조한보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며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손숙돈과 조한보 두 학자는 무극과 태극에 관련된 논의를 편지글이 오가는 것을 보고 이른바 무극태극 논쟁을 제기하여 그 과정속에 회재가 끼어 들어 논쟁의 시대를 열었다. 그 전에 손숙보와 조한보가 무극태극을 설명할 때는 주로 도교와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무無(허)를 가지고 주로 설명을 하였다.

이 당시 주자학의 연구가 회재 이언적 만큼 깊이 있는 수준에 도달한 학자가 없었기 때문에 불교와 노장의 이론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언적은 주희의 철학에 근거하여 무극과 태극에 모두 理를 지칭한 것이지 氣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고 정리 하면서 동시에 이는 형질이 없지만 결코 무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 같은 입장은 理를 無로 이해 하려는 노장적 풍조를 경계하여 철저하게 주자학적 사유에 입각하여 무극과 태극을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理를 중시하는 이언적은 같은 理의 철학자 이황으로부터 학문적 지지를 받았다 고향으로 와서 은둔하고 있던 퇴계이황을 그 당시 임금인 명종이 불러도 퇴계가 가지를 않자 화공을 보내 그림이라도 그려 오라고 했다.

퇴계 뿐만 아니라 남명조식도 명종이 불러도 오지 않으니 조정에서 남명조식에게 단성현감(경남 산청)을 하라는 조칙을 내려보내오자 조식선생은 받자 말자 단성소(丹城疏)를 올린다. 그게 유명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이다.

이 당시 문정대비(1501~1565)는 조선11대왕 중종의 계비 명종의 어머니로서 중종이 세상을 떠난 후 명종이 왕이었지만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문정 대비가 나라를 다스렸다.

문정 대비와 남명조식 퇴계이황 모두 1501년생이다. 그 시대를 어떻게 보면 임금은 허수아비고 여인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그런 상황이다. 그 당시 조선은 남성의 나라인데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기 때문에 정권의 권위가 약하여 제대로 나라를 다스릴수가 없었다.

남명 조식은 사직소를 올리면서 대비께서 지혜롭다 하시나 사실은 구중궁월속의 과부에 지나지 않고 지금의 선왕은 어린 고아에 지나지 않으니 이 나라가 제대로 다스릴 턱이 없다라는 식으로 자신은 벼슬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거절하는 상소문을 썼으니 아마 목숨까지 걸었을 정도의 강직한 사직소였다. 현실 정치를 실날하게 비판하며 조정의 현실을 조목조목 밝히는 남명은 실제론 죽을 뻔 했지만 워낙 명망이 높다보니 조정에서 죽이질 못했다.

이제는 한국철학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의 유학자들이 주자학을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주자학 자체가 지니고 있었던 이론적인 난점에 문제를 해결 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논쟁중 대표적인 사건이 이언적의 理를 중시했던 퇴계 이황의 사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단칠정 논쟁의 발단을 알아보자.

사단 칠정 논쟁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규정한 인간의 감정을 어떤 관계로 정리 하느냐를 두고 일어난 논쟁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주자학의 어려운 개념을 알기 싶게 도식화 하여 초학자들이 이해를 쉽게 하는 도설을 만드는 것이 유행 이었다.

이황의 이웃에 살던 정지운 이라는 학자가 천명도(天命圖)를 작성하여 이황에게 보여 주었다.

그런데 이황은 정지운이 보여준 것을 보고 사단은 理에서 발한 것이고 칠정은 氣에서 발한 것이다. (사단리지발 칠정기지발,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로 고쳤다. 이후 천명도를 입수해 본 기대승은 이황이 고친 부분은 사단과 칠정을 정확하게 기술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단칠정논쟁이다.

사단 이라는게 맹자에 나오는데 사단에는 사덕이 있고 사단이 있다.
사단(四端)은 맹자가 인간의 심리현상 중 선한 경향을 가진 네가지 마음 측은지심 (惻隱之心)불쌍히 여긴다는 뜻이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 수오지심 (羞惡之心)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사양지심(辭讓之心)겸손하고 양보할 줄 알고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 할 줄 아는 마음이다.

사덕은 인의예지(仁義禮智) 네가지 덕으로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덕목의 단초가 사단이 된다.

칠정은 예기(禮記)예운(禮運) 편에서 인간의 감정을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의 일곱가지로 나누어 말한 것을 합쳐서 일컫는 개념이다.

사단과 칠정이 중국 주자학에서는 이기론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에 들어와서 인간의 마음에 일어나는 인간 심성과 우주를 설명하는 원리 이기론이 통합되기 시작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퇴계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때 신입생으로 고봉 기대성(1527~1572)학자를 만난 적이 있다. 기대승은 당시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올라와 있었는데 이미 나라 안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마침내 그가 급제하여 조정에 나아가자 온 나라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이황은 그를 잠시 만나 태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짦은 만남이었지만 기대승의 학문적 깊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퇴계가 1558년에 안동으로 내려가 은거 하게 되었는데 기대승이 1559년 전라도 광주에서 공부하고 있으면서 퇴계이황에게 편지를 보내온다.

편지의 내용이 선생께서 일전에 사단과 칠정에 대해 정리하시면서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 말씀 하셨는데 제가 생각해 보니 틀린 것 같습니다.

‘선생님 예기편에 있는 칠정 희·노·애·구·애·오·욕 속에 사단이 포함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인간욕망 전체를 가르키는 것이 칠정이므로 칠정은 모든 욕망이고 그 속에 사단(선한감정)도 포함되어 있으니 하나는 리에서 발하고 하나는 기에서 발한다고 나누면 안되는 겁니다’이런 식으로 비판을 하였다.

퇴계가 늦봄에서 초여름에 이 편지를 받아 본 후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참으로 당당하고 뜻뜻한 지적인데 사단도 감정이고 칠정도 감정인데 같은 감정을 두가지로 나누어서는 안된다라고 하지만 퇴계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도덕과 욕망의 기원이 같을 수가 없기에 도저히 납득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고민을 하는 사이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11월 후반기에 눈이 내리는 어느날 퇴계가 붓을 잡고 답장을 써서 서울에 있던 제자 정자중에게 보낸다.

그리고 서울에 있던 유학자들이 퇴계의 편지를 읽어보고 필사를 해서 또 돌려보고 그런 식으로 광주에 있는 고봉 기대승에게 다시 편지가 내려 간다. 그런사이 퇴계의 편지는 전국을 돌게 되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전국 학술대회쯤의 규모가 일어나는 것과 비슷하다.

퇴계의 입장은 비록 이 사단이 칠정 속에 들어 있다는 구조라고는 하나 가르키는 바가 다르다. 사단은 선이고 칠정이라고 하는 것은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도덕에 맞는 마음을 이야기 할때는 그것만 따로 꺼집어 내어 이야기 할때가 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선을 촉구 할 수 있는거 아니냐 도덕과 욕망은 대립 되는 것으로 봐야 된다는 입장으로 주장을 하였다.

그래서 이 두 논쟁은 장장 8년간 진행된다.
간단히 몇마디 말하고 지내는 것이 아니라 8년간 끝끝내 그 입장이 하나로 통일 되지 않는다.

퇴계입장은 사람들에게 도덕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도덕과 욕망을 대립 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을 하는 것이고 고봉은 욕망은 일단 긍정한다 하지만 퇴계는 욕망을 절제하고 금지하므로써 금욕적 수양론을 전개한다. 기대승은 욕망은 받아 들이되 어떤 욕망은 절제하고 또 어떤 욕망은 추구해도 되는지를 보고 욕망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 하려고 하였다.

이황의 이와 기는 결단코 두 가지 사물이라는 견해를 강조하고, 기대승은 이와 기는 서로 떨어 질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여 서로 견해를 일치 시키는 데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논쟁을 통해 주자학의 존재론과 심성론을 결합함으로써 한국적 심성이론의 토대를 형성 한 것은 동양 철학 사상 대단히 의미 있는 성취이다.

26살이나 많은 대학자 이황선생과 청년 석학 기대승은 나이와 서열을 뛰어 넘은 사상 최대의 논쟁을 이룬 두 학자는 한사람은 남쪽 한사람은 북쪽에 기거하며 오고간 편지는 제비와 기러기 같다.

우리가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8년 동안 진행 한 사단칠정 논쟁을 단시간에 이해 하기는 사실 어렵다.

퇴계의 제자였던 정자중에게 보낸 편지글의 한구절을 나는 읽어 보았다. 내용은 이러하다. 내가 몇 달 동안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주자의 글을 한번씩 보았는데 마치 바늘이 내 몸을 찌르는 것 같았고 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퇴계가 선현의 글을 어떻게 대했는지 엿 볼수 있는 대목이다.

퇴계이황 선생은 끝없는 수양을 보여주며 후세에 진정한 앎이란 무엇인지 교훈을 남겨 주었다. 조선의 철학자들은 치열한 학문적 열정으로 도덕과 욕망의 관계를 논하였다.
다음엔 밤골 선생 이이와 철학적 벗이었던 성혼의 인심도심논쟁에 관하여 실어 드리겠습니다.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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