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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보 작가 |
ⓒ N군위신문 |
물질문명으로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는 자연을 가까이 하는 길 밖에 없다는 주장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래선지 자연을 소재로 한 난이나, 수석, 분재 등의 취미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추세다.
난 취미는 수석과 분재와는 달리 나누어 가질 수 있다는 점이 커다란 장점이다. 베풀고 나누는 즐거움, 이는 어디다 견줄 바가 아니었기에 금란지교(金蘭之交)란 말이 생겨나지 않았나 싶다. 황금과 같이 귀한 난을 서로 나누는 친한 사이를 일컫는 말이고 보면 배금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고가의 난을 스스럼 없이 나누어 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에 옛 사람들이 만든 이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우정에 대하여 전해오는 얘기가 많다.
우정은 산길 같아서 서로 아끼는 마음이 오가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잡초가 우거져서 이내 산길은 묻히고 말기 때문이리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속까지 툭 터 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열자(列子)의 탕문편(湯問篇)에서 백아절현(伯牙絶絃)의 얘기가 나온다.
춘추(春秋)시대에 백아(伯牙)라는 거문고의 명수가 있었고, 그 친구인 종자기(鍾子期)는 듣는 명수였다.
백아가 거문고를 키어 높은 산의 모습을 형용하려 하면, 옆에서 귀를 기울이던 종자기는, “참, 훌륭하군! 높이 솟아 있는 느낌이며 마치 태산(泰山)같고나”라고 칭찬해 주며, 흘러가는 물을 그리려 하면, “정말, 잘 지었도다. 양양한 물이 흐르는 듯 하며 마치 장강(長江)이나 황하(黃河)와도 같고나”하고 기뻐하여 주었다.
이런 식으로 백아가 마음속에 생각하고 거문고의 가락에 의탁하는 기분을 종자기는 뚫어지게 알아 맞추었다.
두 사람은 마음이 맞는 탄수(彈手)요, 청수(聽手)였지만, 불행히도 종자기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종자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백아는 슬피 울며, “이제 내 음(音)을 알아주는 지음자(知音者)를 잃었으니 거문고를 타 무엇하리.”
마침내 거문고를 뚜드려 부수고 현(絃)을 끊어 버렸다.
백아는 금도(琴道)에 정혼을 쏟아 넣어 일세의 명인이라 불리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자기가 죽은 후 두 번 다시 거문고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종자기라는 얻기 어려운 청수(聽手)를 잃은 바에는 이미 자기의 거문고를 들어 줄만한 상대가 없는 비탄에서 온 것으로 참다운 예술정신을 시사하여 주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백아파금(伯牙破琴)이라 하고 있다.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송무백열(松茂柏悅)은 친구의 잘됨을 시샘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한다는 말이며, 간과 쓸개를 서로 내보인다는 간담상조(肝膽相照)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숨김없이 친하게 사귄다는 뜻이고, 옛날 중국의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이 서로 사귄 고사에서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문자가 생겨나고, 문경지교(刎頸之交)는 생사를 같이하는 친구 사이를 나타내는 말 등, 우정에 관한 말들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우정은 곧 믿음이다. 믿음이 없는 우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자의 믿을 신(信)자는 사람(人)의 말(言)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의 말에는 믿음이 실려 있어야 함을 시사하기 때문에 의미 깊다.
입이 있다고 하여 아무 말이나 뱉는 것을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다운 품위가 없는 말을 ‘사람의 말’이 되어도 안 되겠지만 실현하지 못할 허언을 ‘사람의 말’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선 눈앞의 이익 때문에 눈이 어두워 ‘사람의 말’로 믿음을 삼지 못하면서 말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아니한다.
거짓으로 미친 체한 양광(佯狂)의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선생은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선생에게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하여 언행이 어긋나지 않게 일생을 마치려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옛 사람들은 이렇듯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행일치의 소중함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그런 사람이고자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미국 영어교사 전국위원회가 부시 대통령에게 ‘일구이언(一口二言) 최고상’을 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며칠 전 외신이 전했다. 무기 확산 종식 약속을 어기고 미국을 중동지역 최대 무기장사꾼으로 부상시켰다는 것과 대통령 후보지명 때는 모든 어린이가 자유롭게 공, 사립학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으나 거짓이 되었다는 등등이 수상 이유라고 한다.
언행이 일치하지 못했대서 일구이언 최고상까지 받았으니 낙선의 상심위에 수치스런 일까지 겹쳤다.
현대를 가리켜 불신시대라고들 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엔 불신시대라는 말을 무색하게 하는 보석과도 같은 아름다운 사연도 많이 있다.
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1989년 7월이었다. 거제 대우조선 전산실이라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와의 인연은 그 한 통의 전화에서 비롯되었다. 고향이 광주 근처라는 그는 하기휴가에 고향을 들리어 산채를 하려는데 산지를 좀 알려 달라고 했다.
필자의 고향에서 걸려온 전화이기도 하였지만 전화매너가 하도 정중하여 통화가 끝나자마자 중앙지도사로 택시를 타고가 장성과 정읍의 지도를 구입하여 광주근처의 자생지인 장성 모암리와 정읍의 차단리를 표시하여 우송했다.
그날로부터 한 보름 뒤 그의 전화를 다시 받았다. 필자가 소개한 두 곳에서 각각 중투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거듭된 감사의 인사말과 함께 그 중투가 아직 여리어 쪼갤 수가 없으니 촉이 불어나면 분양하여 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1년 뒤 그는 거제 대우조선에서 서울의 대우정보시스템(주)로 전보발령을 받아 필자와 몇 차례 산채를 다녀오기도 했다.
1991년 2월에 그가 보낸 장문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편지를 보낸 사연은 이러했다.
모암리와 차단리에서 만난 중투를 신주 모시듯 잘 길러 왔단다. 중투라고는 그것 밖에 없기도 하였지만 자생지를 소개한 고마움에 답하기 위하여 분양하여 줄 날을 기다려 왔으나 호사엔 다마라더니 설 연휴기간 중 시골에 다녀와서 보니 베란다 난실의 창가에 둔 난들이 동해를 입었더란 것이다. 쓸 만한 난들은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두었기로 피해가 심했다며 그 중투도 그때 얼어 죽었다는 것이었다.
난들을 얼려 죽인 것이 쓰라린 일이기도 하지만 분양하겠다고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점을 몹시 괴로워한 나머지 편지로 그간의 사정을 알리는 것이니 이해하여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가 너무 미안해 할까봐 전화나 답장을 하지도 못하고 세월이 또 흘렀다.
달포 전 일이다. 그가 필자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왔던 길에 들렸다는 것으로 쇼핑백에서 난을 한 분 끄집어내었다.
3촉의 서(曙)로 서호반(曙虎斑)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잎에 윤기가 흐르고 배양상태가 매우 양호했다. 어디에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을 그런 서였다.
1990년 1월 경남 고성에서 산채한 생강근에서 나란히 올라온 2촉의 서 동자묘를 두 분에 심어 길렀다는 것으로 중투를 죽인 후 필자에게 분양하여 줄 것이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것 밖에 없었기로 그 중 한 분을 맘에 들지 모르지만 가져왔다면서 어색함과 초조의 빛이 얼굴에 역력했다.
필자가 퍽 맘에 들어하자 함박웃음을 머금고 이제사 빛을 갚은 것 같아 마음이 후련하다며 총총히 사무실을 떠났다.
입을 떠난 사람의 말은 쏜 화살과 같아서 줏어 담을 수가 없다. 몇 년 전에 일방적이긴 하였지만 남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고 그가 보여준 일들이 햇과일을 깨무는 것과 같은 싱그럽고 상큼한 기운을 안겨 주었기에 사람 사는 재미가 이런 것인가 하여 절로 힘이 솟구침을 느꼈다.
혼자 가슴에 담아 두기가 아까워 난우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서에 얽힌 얘기를 하였더니 누군가가, “요즘 공탕이 잦더니 명품보다 더 귀한 명인을 캤군요”라고 말했다.
그는 대우정보시스템에 근무하는 김대현(金大炫) 과장이다.
▶글쓴이: 이성보
-저서 : 「난향이 머무는 곳에도」, 「석향에 취한 오후」, 「난에게 길을 물어」, 「세상인심과 사람의 향기」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