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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빨간 가을

admin 기자 입력 2017.10.25 11:17 수정 2017.10.25 11:17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가을의 전경이 파노라마 물결처럼 펼쳐진다. 찌는 듯한 무더위를 앞세우고 전국을 누비던 여름. 북쪽에서 내려오는 선선한 바람에 조용히 자리를 떠난다. 그 자리에 풍요로운 결실의 가을이 소리 없이 찾아든다.

가을이 왔나 보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가슴을 내밀어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신다. 기분이 상쾌하고 힘이 솟구친다. 창밖을 내다보면서 지난해 황홀했던 향연을 더듬어본다. 들녘은 황금을 가득 실은 물결이 실바람 타고 살랑거린다.

울긋불긋한 오색 단장한 물결이 남쪽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남쪽에는 화려한 손님을 맞이하려 설레는 마음으로 분주하다. 떠나고 맞이할 준비를 조용히 끝낸 자연의 섭리에 신비함과 오묘함을 느낀다.

가을이 깊어간다. 귀뚜라미가 풀잎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다. 무엇이 그리도 슬픈지 처량한 목소리로 밤새도록 울어댄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밤 설치며 내 마음도 슬펐다. 나뭇잎 하나 떨어질 때마다 귀뚜라미는 그를 못내 그리워하며 밤새껏 운다.

화려했던 여름. 공연을 끝내고 손 흔들며 작별 인사한다. 영글어진 곡식들은 만삭되어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인 체 대지와 속삭이고 있다. 거두어드릴 시기에 느닷없이 찾아드는 태풍에 불안스럽다. 잘 보살펴 달라고 가을에 부탁하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풍성한 가을.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숨 쉴 틈 없이 바쁜 손길을 재촉한다. 부지깽이도 일어날 정도로 바쁘다. 아장아장 걸음마 배우는 아기는 마당에서 비틀비틀 걸으며 손에 닥치는 대로 집어 먹는다.

입가엔 닭똥으로 뒤범벅이 된다. 온 식구가 추수에 매달려 아기 볼 겨를이 없다. 들판은 머리에 수건을 걸치고 흰옷 입은 사람들이 나락 단을 안고 한곳으로 모으면서 오간다. 백조가 사뿐히 내려앉아 하얀 물감칠해놓은 듯 평화롭게 보인다.

알알이 맺힌 벼 이삭을 만져보면서 기쁨을 만끽한다. 힘들어했던 지난날의 고통을 잊은 채 하루를 시작한다.

소 질매에 옹기를 달고 나락 단을 실어 나른다. 아침 먹은 배가 이내 꺼져버린다. 일이 보배다. 하신 어른들의 말씀이 기억난다. 점심때가 되면 갈치에 무, 파 넣고 부글부글 끓인 찌개와 풋배추에 된장을 넣어 싸 먹는 밥맛은 꿀맛 같았다.

어린 나이에 볏단을 가득 실은 황소를 몰고 집까지 온다는 게 쉬운 일 아니다.
좁은 길목을 지날 때면 혹시 옹기가 담벼락에 대여서 소가 넘어질까 봐 가슴 조였던 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아침에 일을 시작할 때에는 힘이 남아 돌아간다.

늦은 오후가 되면 힘이 빠지기고 탈진되어 괜스레 짜증 난다. 아무 생각도 없다. 그저 일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그런데도 해야 한다. 집으로 가져온 볏단을 탈곡기로 타작한다. 탈곡기를 발로는 딛고 손으로는 볏단을 굴리면서 타작한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면 쉬워 보여도 매우 위험하다.

탈곡기에 볏단 끝부터 서서히 대여야 하는데 마음이 급해 이삭 전체를 대었다. 탈곡기 속에 볏단이 박혔다. 일하기 싫거든 나가라 하며 아버지가 야단친다. 아무 말 없이 골 부리지 않고 하던 일 다 했다.

한번은 힘이 딸이어서 볏단을 안고 공중을 한 바퀴 돌았던 일도 있었다. 타작하다 보면 콧구멍은 시꺼멓고 얼굴은 온통 땀에 뒤범벅되어 꼴이 말이 아니다. 희미한 전깃불 밑에 밤늦도록 온 식구가 매달려 타작한다.

타작하고 나온 짚단도 날라야 한다. 한두 번은 재미있는데 반복하다 보면 힘에 겨워 싫증 난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힘에 벅찼다. 그래도 해야 한다. 농촌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벼 타작이 끝나기도 무섭게 배추 무 등 밭작물 수확이 바쁘다. 콩도 뽑아야 하고 조, 지정 등도 거두어 들어야 한다. 소는 보배와 다른 바 없다.

농사철 되면 모든 것 소로 실어 날라야 한다. 자질구레한 농사일 모든 것은 힘에 의존한다. 힘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면 해삼처럼 푹 퍼져버린다. 그럴 때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세상의 허무함을 느낀다.

가을은 일 년 중 제일 바쁘다. 다음 해 보리가 나올 때까지 먹을 양식을 준비해야 한다. 힘들었던 추수가 모두 끝나면 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인다.

김치 단지 묻고 김장배추를 차곡차곡 넣어 뚜껑을 닫는다.
가을이 끝난다. 후유~ 하면서 아픈 허리를 펴면서 등을 두들겨본다. 이제 살았구나 하며 맑은 하늘을 쳐다본다. 청명한 가을 하늘에 높이 매달려 있는 달과 별들은 세안한 듯 더욱 아름답고 빛나 보인다. 빨간 가을은 풍요를 몰고 오는 신비로운 계절임이 틀림없는가 보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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