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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벙어리 냉가슴

admin 기자 입력 2017.10.25 11:18 수정 2017.10.25 11:18

↑↑ 이성보 작가
ⓒ N군위신문
일찍이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에 의해 고결함과 충성됨의 표상이 된 난은 선비들이 즐겨 기른 화초였다.

선비는 마음이 어질고 학문을 높이 닦았으나 벼슬길에 나서지 아니한 사람을 일컫고 있다. 때가 오면 세상에 공을 세우지만 사람들이 몰라주어도 스스로 수덕하며 자족하고 살아가는 여유 있는 삶이 마치 혼자서 꽃피우는 난의 삶과 공통되기에 난은 선비정신의 상징으로 찬미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의 물질문명은 어느 사이에 난을 상품화시켜 버리고 말았다. 난을 대하는 마음, 채란의 마음, 가꾸는 마음, 나누어 주는 마음 모두가 돈과 결부되어 난이 내면에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치의 난성은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작금의 난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은 하나같이 난을 돈으로 보는데서 비롯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때에 옛 선비들이 기린 난성팔덕(蘭性八德)을 음미해 봄도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난성팔덕은, 첫째 수미성(秀美性)으로 구김살 없이 넘치는 생기와, 둘째 여윤성(麗潤性)으로 윤기 있는 고운 잎의 신선미와, 셋째 정지성(貞志性)으로 꺾을 수 없는 곧은 의지와, 넷째 향원성(香遠性)으로 온누리를 밝히는 향기와, 다섯째 결백성(潔白性)으로 잡 때를 용납지 않는 순결과, 여섯째 인고성(忍苦性)으로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인내와, 일곱째 정감성(情感性)으로 보살핌에 보답하는 정성과, 여덟째 식근성(殖根性)으로 혈통을 분명히 하는 뿌리 찾음 등으로 요약되고 있다.
지난 봄이었다.

전북 J시의 N선생은 K선생과 함께 가까운 입암산으로 산채를 갔다. 하루 종일 헤매다 해질 무렵에 산반(散斑)를 만났다. 거듭된 공탕 끝에 만난 것이라서 그 기쁨은 어디다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산반’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일행을 찾았다. 멀리 떨어져 있던 K선생이 뛰어가 보니 중투와 산반을 1미터 간격에다 두고 N선생이 흥분하고 있었다. 가만히 N선생의 거동을 보니 뭔가 이상했다. 바로 곁에 있는 중투는 눈길 한번을 주지 않고 산반만 쳐다보며 ‘산반’이라고 좋아하고 있었으니 이상할 수밖에.

중투와 산반의 가운데쯤에 스틱이 놓여 있었으나 N선생은 그때까지 중투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모처럼 산반을 만나 흥분한 나머지 눈에 보이는 게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K선생은 비록 N선생이 중투를 미처 못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으나 섣불리 캘 수도 없었다. 별 것 아닌 것이라면 몰라도 중투였기에 말을 할 수도 안할 수도 없어 망설였다. 신바람이 난 N선생이 산반를 캐고 난 후에야 중투가 곁에 있음을 알렸다.

그때사 중투에 눈을 돌린 N선생, 이게 무슨 조화인가, 곁에 있는 중투를 보지 못하고 흑싸리 쭉지 같은 산반에 껌뻑 죽어 있었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기로 금방 안색이 달라졌다. 분위기가 이상해져 K선생도 캐기가 멋쩍었으나, 키워서 나누어 갖자는 말로 N선생을 위로했다.

그날 저녁 푸짐하게 식사대접을 한 K선생은 며칠 뒤 무슨 영문인지 복륜과 색화 한 분의 난을 N선생께 건네주었다. 전날 고마움에 답하는 것이겠지 하고 별 생각 없이 받아 두었으나, 들리는 소문은 그게 아니었다.

K선생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문제의 중투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이다. N선생 덕분에 중투를 만난 것이니 의당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의견과 캔 사람이 임자이니 나누어 줄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으나, 결론은 나누어 줄 필요가 없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는 것이었다.

그런 소문을 전해들은 N선생은 심기가 불편했다. 교통사고의 경우에도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처벌을 면치 못하는데 하물며 자기 때문에 만난 난을 두고 떠도는 말이 불쾌하였지만, 정작 나서서 무어라고 따질 형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중투를 생각만 해도 부아가 치밀었다.

중투를 나누어 주는 대신 복륜의 색화를 보낸 얄팍한 계산심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못내 서운함에 밤잠을 설치며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 속을 끓여야 했다.
누구나 작은 일로 해서 큰 것을 잃어버리는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기 쉽다. 난을 기르되 난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되돌아 볼 일이다.

▶글쓴이: 이성보
-저서 : 「난향이 머무는 곳에도」, 「석향에 취한 오후」, 「난에게 길을 물어」, 「세상인심과 사람의 향기」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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