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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춘수 원장 |
ⓒ N군위신문 |
불이야! 나무로 불씨를 일으켰던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기쁨의 함성이다. 대형 화재사고로 쓰라린 아픔을 호소하는 문명시대 사람들의 절규하는 소리이다. 기쁨과 슬픔을 공유한 불씨 언제나 머쓱한 상태로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다.
부싯돌이며 쌈지와 곰방대는 아버지의 상징이었다. 부싯돌로 마구초(본명:풍년초)를 피웠던 시절이다. 마구초는 담뱃잎을 따다 말려 막 썰어서 자연 그대로 피웠다고 해서 마구초라 했다. 곰방대에 바싹 말린 잎담배를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 꼭꼭 쑤셔 넣고 불을 붙였다.
방안 가득 풍기는 은은한 아버지의 냄새는 마구초에서 배어났다. 살이 빠져 오목하던 아버지 얼굴이 담뱃대를 빨아드리면서 더욱 오목해졌다. 빨아드린 연기를 내뿜으면서 피로를 잊은 듯 편안해 보였던 아버지 생각이 떠올랐다.
진풍경도 있었다. 형들은 어른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했지만, 우리 앞에서는 뽐내며 피우곤 했었다. 담배라고 하지만 마구초도 아니었다. 바짝 마른 쑥을 비벼 부드럽게 한 다음 종이에 돌돌 말아서 피웠다. 부싯돌로 수십 번 쳐서 겨우 불을 붙였다.
어른들이 담배 피우는 시늉을 하며 연기를 내뿜는다. 연기는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희스무레한 연기는 호박이며 감자 무지할 때 피어나는 연기랑 손잡고 춤을 추며 하늘을 누비는 것 같다.
일상생활에는 필수적이었다. 겨울철이면 저녁밥을 지은 후 부엌에서 타고 남은 잔불을 부삽으로 화로에 담아 불씨로 사용했다. 방 윗목에 놓여 있던 화로는 방의 온기를 따뜻하게 했다.
다음 날 아침이면 화롯불에서 불을 붙였다. 부엌과 소여물 끊이는 아궁이가 두 개 있었다. 다른 집보다 먼저 부엌 굴뚝에서 연기가 나야 부자가 된다는 속설에 늘 부엌에 먼저 피웠다.
마른 솔가지에 불을 붙여 쇠죽 끊이는 아궁이로 가져 왔다. 아궁이 깊숙한 곳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이른 새벽 찬 공기를 훈훈하게 했다. 타닥거리며 타는 나무의 불빛이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을 알렸다.
이웃집에서 불이 꺼졌다 하며 이른 새벽에 불씨 얻으러 왔다. 밤새도록 뭐했기에 불씨가 꺼졌던 줄도 모르고 있었나? 어머니는 불씨를 댕겨 주면서 야단치셨다. 새벽에 불씨를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면 우리 집에 들어올 복을 가져간다고 해서 싫어했다. 부엌에 남은 잔불이 꺼지지 않도록 그 위에다 재를 얹고 부삽으로 꼭꼭 다져놓았다. 그만큼 불을 아끼고 소중히 여겼다.
신혼부부가 셋방 구하려고 왔다. 피난 후 집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때도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쾌히 승낙해 주었다. 방에 도배랑 방바닥이며, 창문이며 손이 가는 곳마다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했다. 부부가 이삿짐을 들고 들어왔다.
방안을 둘러보더니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자기 어머니가 해 주신 것처럼 너무 깨끗하게 꾸며 놓으셨다 하며 감동했다. 일여 년이 지나고 장군 같은 아들을 얻었다. 처음으로 아들을 얻은 부부는 행복해 보였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아들을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모습 아련히 떠올랐다.
한밤중 난데없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들렸다. 불이야 하는 소리였다. 다름 아닌 새들어온 옆방에서 소리가 났다. 원장님, 우리 방에 불 불났어요. 하며 다급히 나를 불렸다. 그 소리를 듣고 손에 닥치는 대로 쥐고 허겁지겁 뛰어갔다. 전기과열로 불이 천장에 붙어 막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응급 결에 가지고 간 옷가지로 불이 붙은 자리를 눌려댔다. 다행스럽게 불은 번지지 않고 꺼졌다.
정신을 차리고 내 모습을 보았다. 잠옷 바람으로 남의 신혼 방에 뛰어들어갔다. 어찌할 바 몰랐다. 집에 불이 났었던 생각은 간 곳도 없어졌다. 황급히 뛰어나왔던 기억을 생각하면 도저히 웃을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이 시대 마지막 성냥공장이었던 의성에 있는 성광성냥공업사에서 제작된 ‘성광성냥’이 있었다. 성냥이 나오면서부터 불 걱정이 사라졌다. 밤사이 불씨가 꺼지면 어떡하나 걱정되어 저녁에 몇 번씩이나 부엌에 들락날락했던 어머니가 제일 좋아했다.
담배 한 대 피우려면 부싯돌을 수십 차례 치며 애를 먹었던 아버지도 좋아했었다. 어디에 가도 성냥불이 있으니 살기 좋은 세상을 만났다. 하며 모든 사람 좋아했다.
그런데도 좋은 일에는 반드시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호사다마란 말 있다. 궂은 날이면 성냥은 맥을 못 추었다. 습기로 성냥이 눅눅해져 불이 안 일어나 애를 먹었던 일도 많았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면 제일 먼저 성냥을 간직했다. 우산도 없고 보릿짚으로 엮은 도리도 없어 잎이 넓은 나뭇잎으로 여러 겹 싸서 품속에 간직했던 일도 있었다.
성냥불이 없으면 감자며 고구마 무지를 해먹을 수 없어 제일 큰 걱정거리였다. 배고픈 시절 간식이나 군것질은 감자 고구마 무지와 밀 콩서리 이외는 아무것도 없었다.
잊혀져간 추억거리였다. 이른 새벽 우리 집에 불씨를 얻으려 왔던 아주머니가 어머니한테 혼났던 장면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담배 한 대 피우려 부싯돌을 수십 차례 두드렸던 아버지 삶의 현장을 그려보았다. 간식거리가 없어 돌무지와 서리에 의존하면서 정겹게 살아 왔던 그 시절 그리워졌다. 부싯돌 불씨가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훨훨 타오르고 있다.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