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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혼란의 시대를 밝힌 율곡이이(4)

admin 기자 입력 2018.01.02 09:47 수정 2018.01.02 09:47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조선시대 선비 가운데 퇴계이황과 더불어 쌍벽을 이룬 사람이 바로 율곡이이(栗谷 李珥:1536~1584)다.

밤골 골짜기에 살았던 그 지역 사람들은 율곡선생을 밤골 선생이라 불렀다. 이황과 이이는 학문뿐만 아니라 훗날 두 사람의 학문을 이어받은 제자들이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라는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 집단을 이루었다는 점에서도 한국철학사에 차지하는 무게는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일상속의 도리 즉 실천을 중요시 하는 어두운 시대 등불을 밝힌 철학자 중 퇴계와 조식선생을 합친 분이 율곡선생 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황선생은 독창적인 주자학을 전개 하였다.
이황선생은 거의 벼슬을 안했지만 임금이 부르니까 할 수 없이 나가서 홍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현 대학총장)같은 권력의 자리가 아닌 명예직 같은 자리를 1,2년씩 하였다.

조식선생 같은 경우는 퇴계보다 더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조정에서 불러도 거절해버린다.
조식선생(1501~1572)이 1572년 세상을 떠나고 20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 때 조식의 제자 중 의병장으로 활동한 사람이 50여명 이었다.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에게 올곧은 의병정신을 심어주어 나라를 지키게 만들었다.

이황 같은 경우는 아주 인자한 선생으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완벽한 소유자로 보인다면 남명조식 같은 경우는 천길 앞의 큰 벽이 있는 것 같은 묵직함과 강인함이 엿 보인다.
두 분은 글의 표현도 각각 다르다.

이황은 온유한 글과 시조도 많이 남겼다 이황은 수양을 도덕과 욕망을 대립된 입장으로 도덕을 가지고 욕망을 제한해야 된다고 하였다면 조식 같은 경우는 내 마음에 욕망이 침범하면 단칼에 베어버려야 한다는 식으로 조식은 늘 칼을 차고 다녔다.

왜적이 쳐 들어오면 단 칼에 쳐 죽이자 이런 식의 글을 썼다.
아마 나라에 큰 환란이 올 거라 예견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황은 자신이 죽고 나면 묘지명에 처사(處士)라고 해라 하였다.

(묘지명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일대기를 돌 같은데 적어서 무덤 속에 같이 넣어 주는 것이다.)
처사라고 하는 것은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라는 뜻으로 원래는 처사가 별로 좋은 뜻이 아니었다

맹자는 처사는 무자격 선비라는 뜻이라 했다.
이황은 자신을 낮추어서 처사(處士)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당시 사회는 처사가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중앙의 정치권력이 썩었기 때문에 썩은 정치권력에 섞여서 한자리 해 보겠다는 식이 아니고 오히려 초야에 묻혀 학문연구와 제자들을 양성하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높은 호칭이 된다.
이황과 조식의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이이(李珥)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보았다.

이이는 중종31년 강원도 강릉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법을 담당하는 사헌부의 감찰 벼슬을 지내는 이원수 였고 어머니는 오늘날 한국 어머니들의 상징이 된 사임당이다.

경포대 근처에 있는 이이가 태어난 집은 검은 대나무가 자란다 해서 오죽헌(烏竹軒)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그 곳에 가면 검은 대나무를 볼 수 있다.

이이가 태어났던 방에는 몽룡실(夢龍室)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동해 바다에 사는 용이 아기를 안고 집으로 들어와 사임당의 품에 안겨 주는 꿈을 꾸고서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어렸을 적에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용이라는 뜻으로 현룡(見龍)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팔기 위한 물건을 만들거나 장사를 할 수 없었다.
선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공부뿐이었으며 그 때문에 가난한 선비는 집안을 돌보기가 어려워서 처가 신세를 지는 경우가 많았다.

예전에는 우스갯소리로 어려서는 외가 덕을 보고 장가가서는 처가 덕을 본다고 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이도 아버지가 처가의 신세를 지는 덕에 외가에서 태어나 자란 것이고 자신 역시 훗날 처가인 경기도 파주 밤골 마을에서 여러 해를 살았다.

처가 동네인 밤 골 마을은 이름처럼 밤나무가 많았으며 이이의 호인 율곡도 바로 그 밤골에서 따온 것이다.

사실 처가살이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가 훨씬 많다 지금도 파주 임진강 부근에는 화석정을 비롯하여 이이와 관련된 문화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이이는 훗날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 사임당의 교육에서 온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사임당의 인품과 예술적 재능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한번은 사임당이 집안 잔치에 간적이 있었는데 어떤 부인이 방구석에서 어쩔 줄 모르며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딱해 보여서 무슨 일로 울고 있는지를 묻자, 그 부인은 초라한 모습으로 잔치에 오기 싫어서 남의 치마저고리를 빌려 입고 왔는데, 그만 치마에 국물이 떨어져 옷을 망쳐 버렸으니 새 옷으로 변상해 줄 길이 막막해서 운다고 하였다.
이야기를 들은 사임당은 주인에게 먹과 붓을 빌려 오게 해서는 그 부인의 치마를 벗겨 방바닥에 펼쳐 놓고 그 위에 포도 그림을 그렸다.

치마에 묻은 국물 자국이 사임당의 붓끝에서 포도송이로 바뀐 것이다. 그림 그리기를 마친 사임당은 치마를 돌려주면서 이 그림을 시장에 내다. 팔아 새치마감을 마련하라고 하였다 실제로 시장에 나가 팔았더니 그 돈으로 좋은 치맛감을 사고도 돈이 남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유가경전에도 밝았고 글뿐만 아니라 글씨와 그림까지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던 사임당은 이이가 16세 되던 해에 죽음을 맞이하자 삶의 회의와 충격을 느낀 이이는 삼년상을 마치자 19세에 금강산 절에 들어가 불교 공부를 하였다.

뒷날 당쟁이 일어나자 이이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이이가 입산하여 머리를 깎았다고 주장하고 옹호하는 쪽에서는 산에 있는 동안 머리를 다듬지 않아 나중에 세상으로 돌아 왔을 때 상투 크기가 커다란 방망이 같았다고 변호하기도 했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유학에서 다루지만 생노병사를 다 다루지는 않는다. 유학에선 내가 왜 태어났는지 라는 질문은 없다. 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를 던지는 것은 불교이고 사실 중국에서 성리학이 성립될 당시 그 바탕에 불교적 사유체계가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성리학자들과 달리 이이의 사상에는 불교적 요서가 많이 들어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20세 되던 해에 논어를 읽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고향으로 돌아와 그 뒤로 오죽헌에 머물면서 성인이 되겠다는 목표를 정해 놓고 열심히 공부 하였다.

23세 때는 그 당시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58세였던 이황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고 이틀을 함께 지냈다. 함께 시를 주고받으며 학문적 토론을 벌이면서 이이의 재능에 깊이 감명 받은 이황은 뒷날 제자 조목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이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뒤에 태어난 사람이 두렵다”고 한 공자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고 하였다.

요즈음은 58세라고 하면 한창 젊은 전성기 이지만 그 당시는 원래 애(艾)라 해서 시든다 라고 할 나이다.
예기(禮器)에 인생백년을 기(期)라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게 백년으로 보았다. 요즘도 백년을 살기란 쉽지 않지만 어찌되었던 건강하게 살면 백년은 살 수 있다고 보았다. 1살부터 50살까지는 올라 가다가 50세부터 100세 까지는 점점 살아갈 날이 줄어들며 시든다.

맹자도 50세가 되면 비단옷을 입을 수 있고 70세가 되면 비단옷에 육고기까지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상례에 50세가 되어 부모상을 당하면 지팡이를 주지만 부모상을 당해도 50세가 넘지 않으면 지팡이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50세가 되지 않아도 아내가 세상을 떠나면 지팡이를 준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조사를 해 보면 배우자 사망이 제일 큰 충격이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나이에 관계없이 지팡이를 주는 것은 정신적인 충격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온 나라에서 존경하는 58세의 이황선생과 젊은 학자 이이의 만남을 요즈음 IT기술로 녹화를 했다면 무슨 음식을 먹었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중요한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철학사에서 두 분의 만남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두 선생의 만남을 지켜본 이황의 제자 중에 40세가 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황이 이이를 어찌나 극진히 대했는지 제자들은 나이도 한참이나 어린데 싶어 탐탁찮게 생각하였다.
이이가 떠나기 전에 詩를 한수 짓고 떠난다.

나이 많은 이황의 제자가 시를 잘 썼나 하고 보니 보통 시가 아니었다.
제자가 스승에게 선생님 사람은 시원찮아 보이던데 시는 훌륭하고 좋으네요 하니 퇴계가 하는 말이 시가 사람보다 못하지 하였다.

사람이 시 보다 못하다 한다 해도 두 가지 다 훌륭하다는 표현이다.
이황은 이이의 인품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35세의 나이차이가 있어도 이이가 가지고 있는 학문과 사상을 중요시 하였다.

다른 뛰어난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이이에게도 뚜렸한 스승이 없었다.
그의 학문체계는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낸 독창적인 것으로 특히 어려서부터 천제적인 재능을 보였다. 서너 살 무렵부터 말과 글을 배워 13세에 처음으로 과거시험에 응시하고 소과 대과에 붙어 벼슬에 나아가기 까지 남들은 한번 붙기도 어려운 과거 시험을 아홉 번에 걸쳐 그것도 수석으로만 합격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이를 아홉 번 장원 했다는 뜻으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렀다.

과거공부는 문, 사, 철(문학, 역사, 철학)에 대한 소양을 기르는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사대부의 교양학습이나 학문탐구와 그 성격이 비슷하지만 합격을 위해서 응시하는 시험의 종류에 맞추어 과문(科文)과 효과적인 공부법을 강구하여 공부해야 했다.

1558년 이이는 23세 때 별시 해(국가의 경사를 기념할 때 시행하는 경과慶科의 종류)에 천문기상의 순행과 이변 등에 대해 논한 답안이 그 유명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급제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그 시기의 중요한 사회적 관심이 무엇인지에 따라 과거 시험의 출제 경향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세종 무렵에는 과학 지식과 관련된 문제가 많이 제출 되었고, 선조 무렵에는 우주자연에 대한 이기론적 이해를 묻는 질문이 많았다.

이 같은 관심 때문에 이이가 쓴 유명한 과거시험 답안지 가운데 자연의 변화를 기(氣)의 변화로 설명하면서 임금의 수양을 강조한 천도책(天道策)은 사상의 형성기에 해당하는 글이면서도 이이의 사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당시 문제를 출제한 시험관들은 자신들이 여러 날 고민해서 만든 문제에 대해 젊은 이이가 아주 짧은 시간에 훌륭하게 답을 써 낸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하며 답안 내용이 너무도 뛰어 나서 중국에 까지 알려졌다. 당시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해 언제나 고자세였다 이이가 47세 때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직책을 맡았는데 중국 사신들도 천도책을 알고 있어서 이이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공손히 대했다고한다.
(다음호엔 인심과 도심에 대하여 실어 드리겠습니다)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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