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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삼국유사』는 신앙인가?

admin 기자 입력 2018.01.02 09:49 수정 2018.01.02 09:49

↑↑ 김완수 교수
ⓒ N군위신문
오래전부터 군위는 『삼국유사』의 고장이다. 정확히는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로 피아르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이 구호 외에 팔공산, 개나리, 느티나무, 왜가리와 장군이가 각각 군위군을 상징하고 있다. 이들 다섯 상징에 대하여서는 군위마을지, 군위의 향맥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모두가 군위사람 곁에 있는 자연물로 상징물로는 가히 한국의 향촌가운데 으뜸이다.

고려의 선승 일연스님(1206∼1289)이 각시산(옥녀봉)과 군위호(군위댐)사이 학소대 건너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찬술하였다는 것은 부동의 사실이고, 또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와 쌍벽을 이루는 역사서라는 사실 또한 우리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이미 진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군에서는 군위군을 알리는 브랜드로, 또 상표로 『삼국유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하는 데에는 엄청난 양의 자료가 필요하였다. 이들을 수집하고 정리하기 위하여서는 측근에서 도와주는 사람은 물론이고 가지산문문도들의 네트워크와 그들의 희생도 절대적이었다. 당시 스님은 국존의 신분이었고, 또 당대의 학승이자,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렇다 해도 스님혼자서 『삼국유사』를 저술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료는 어느 시기에, 또 어느 곳에 스님이 주석하였을 때 모았으며, 그리고 스님의 저술을 도운 사람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대개의 학자들은 자료채집시기를 스님이 인각사에 오기 전인 달성 비슬산에서 20여 년간 머물렀을 때로 추정하고 있으며, 또 측근조력자로 청풍김씨 청분(淸?, 1251∼1322)을 지목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삼국유사』는 역사서로서는 물론이고 문학서로도 절대적이고 독보적이다.

삼국의 역사, 문학, 종교, 지리, 사상, 미술 등은 물론이고 고조선, 가락국기 등 『삼국사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려하지 않은 자료를 채집하여 남겼기 때문이다.

그동안 군위군에서는 여러 번에 걸쳐서 『삼국유사』학술대회를 개최함으로서 명실공이 『삼국유사』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지방자치단체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한 셈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우리 군위에서 『삼국유사』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자생기구를 가져야한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 연구기관[군위 삼국유사연구원]을 통하여 군위군민에게 직접 『삼국유사』의 가치를 이해시키고 홍보하여야한다.

아직까지 군위군과 군위군민들은 『삼국유사』를 곁에 두기만 하여도 많은 이득과 행운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소망은 커다란 착오이다. 그간 국내외 많은 학자들이 『삼국유사』에 대하여 많은 연구결과를 쏟아내었지만 이러한 방향은 학자, 공무원의 제한된 발상에서 멈출 것이다.

지금은 이제까지의 학술활동, 연구보고가 군민들에게 어떤 혜택을 주었는가를 돌이켜 생각해 볼 때이다. 학자를 위한 연구는 군민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군위군이 빨리 깨우쳤으면 한다.

군위군에 드리는 고언이다.
다시 말하면 이제까지의 모든 학술행사를 타지에서, 외지인들이 주관하였다. 군위군, 군위사람은 어떤 이유에선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그렇게 하여 군위군에 어떤 이득이 있었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역겨운 물음에는 당혹스러운 해답만이 돌아온다.
그렇다고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교육문화회관의 세미나, 전국규모의 마라톤대회와 학생퀴즈대회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리고 최근의 향가세미나도 물론이다. 다시 한 번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모든 행사를 군위군 안에서 군위군민이 주체가 되어 참여하고 군위군민의 손으로 운용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것은 이해되지만 부족한 것은 지금이라도 유기적인 시스템을 갖추어서 준비하고 양성하여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군위군민에게 민주시민으로서의 긍지를 가질 수 있게 하고, 또 나아가 ‘삼국유사축제’에 대한 역량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신라향가에 대하여 덧붙이고자 한다.
1세기중엽, 군위에서 수백 년간 〈아!
(강자), 붉은색 비단옷이여 …〉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의식의례를 치렀던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그들이 불렀던 곡은 사라진지 오래이지만 그들의 노랫말은 일부 전승되고 있다. 군위 정리마을의 선조들이다. 당시 군위 땅이 신라의 강역이었더라면 신라향가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 노랫말에서 깨우칠 수 있다면 『삼국유사』가 군위군민의 종교이길 바라지 말고, 군위가 강소( 小)향촌으로 발전하는 도구로,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인 것이다.

2018년 첫날에,

군위문화원 前향토사연구소장
공학박사 김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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