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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시대를 밝힌 율곡이이(5)

admin 기자 입력 2018.01.14 22:21 수정 2018.01.14 10:21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한국철학사상 이황과 기대승의 치열한 논쟁이 장장 8년이라는 시간을 끌면서 진행 되었던 사단칠정논쟁에 버금갈 정도의 중요한 논쟁이 이이의 벗이었던 성혼과 인심도심 논쟁이다.
인심도심논쟁의 주제는 인간의 심리현상을 다루고 전개 되었다는 점에서 사단칠정논쟁과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심과 도심은 본래 유학의 고전 중 서경에 나오는 말이다.
본래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천하를 전해 주면서 “진실로 그 중(中)을 잡아야 한다 윤집궐중(允執厥中)지나침도 없고 모자라지도 않는 핵심”이라고 하여 중(中)을 정치의 요체로 강조했다.
이때 中은 양극단을 배제한 최선의 정치를 뜻하는 말로 중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후 요임금에게서 이 말을 전해 받은 순임금이 다시 우임금에게 천하를 전하려 할 때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무엇이 인심이고 무엇이 도심인지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도심을 지켜야 진실로 그 中을 잡을 수 있다”라고 더 보태서 이야기 했는데 여기에 나오는 인심과 도심 개념을 둘러싸고 견해를 달리한 것이 이이와 성혼 사이에 일어난 인심도심 논쟁이다.

인심도심논쟁에 앞서 비슷한 주제로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전개된 사단칠정논쟁은 두 학자 간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이는 본질적으로 이기론과 심성론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정도로 완전하게 결합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쟁은 언제라도 재연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황이 생존해 있었을 때는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그가 죽은지 2년이 지나서 성혼이 이이에게 인심과 도심에 관한 논의를 제기 하면서 인심과 칠정은 기(氣)의 작용이고, 도심과 사단은 이(理)의 작용으로 나누어 보고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지지하면서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이와 성혼 사이에 일어난 인심도심논변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이루어 졌는데 두 학자는 각각 아홉 차례에 편지를 보냈는데 대체로 성혼이 문제를 제기하고 이이가 대답하는 방식으로 논쟁이 진행되었다.

그러면 인간의 본성은 어떤 것일까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했다면 순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인간은 본성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선호 한다.
또한 정욕을 따르는 행위는 일정한 규제나 제한이 가해지지 않으면 악으로 흐르며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자원이 부족하므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경쟁이 일어난다.

그래서 조선 성리학자들은 제일 관심있게 연구한 것이 4단 7정과 인심도심이다.
이황과, 기대승, 이이와, 성혼, 등 조선시대 주자학자들이 사단(四端)과 칠정(七情),그리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라는 몇가지 개념을 통해 인간의 심리현상을 분석한 것은 욕망과 도덕의 관계를 분명이 함으로써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인지 확인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학문적 주제는 인간의 도덕심과 욕망에 관한 것으로 주자학의 전통적 주제를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이황의 경우는 인간의 물질적인 욕망을 위태로운 것으로 보고 가능하면 도덕심으로 물질적인 욕망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수양론을 제기한다.

그 때문에 수양의 중심이 되는 도덕심을 욕망과 분리시켜 파악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욕망을 도덕심의 하위 영역에 두고 위계적인 구조로 심성론 체계를 수립하려고 했다 그로 인해 사단을 이(理)에 소속시켜 이발(理發)로 설명하고 칠정을 기(氣)에 소속시켜 기발(氣發)로 설명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도덕심이 욕망 속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존재로 독립되어 있다는 입장을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理)가 기(氣)보다 앞서는 존재라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도덕성을 제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이는 인심과 도심을 어떻게 바라 보았을까?
인심에서 악이 발생하는 것은 객관적 상황과의 부조화 때문이다.
마음이 아직 발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인심과 도심의 구분이 무의미 하다 도덕과 욕망은 모두 인간의 마음을 구성한다.

물질적인 욕망 자체가 반드시 도덕과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즉 도덕심이든 욕망이든 모두 인간의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일부이므로 욕망을 제거하고 도덕심을 지키는 방식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에 선다.

그 때문에 가능하면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시킨다.
이이가 이황과 달리 국가의 부국강병과 구체적인 민생과 관련된 여러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욕망을 바라보는 그의 이 같은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 성리학자들이 사단칠정을 가지고 많이 싸운 이유는 인심, 도심론 보다 중요해서가 아니라 사단칠정론에서 의견이 많아서이다.
사단에 인심을 넣을 것이냐 말것이냐에 따라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인심, 도심론은 당연히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심과 도심 즉 욕심 섞인 마음과 순수한 마음은 어떤 마음에서 시작하여 어떤 마음으로 끝나는지 경우를 나누어 본다면, 도심에서 시작하여 도심으로 끝나는 경우, 인심에서 시작하여 인심으로 끝나는 경우, 도심에서 시작하여 인심으로 끝나는 경우, 인심에서 시작하여 도심으로 끝나는 경우의 네 가지가 있다.

도심에서 시작하여 도심으로 끝나는 경우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인심에서 시작하여 인심으로 끝나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도심에서 시작하여 인심으로 끝나는 경우와 인심에서 시작하여 도심으로 끝나는 경우이다.

구봉(龜峰)송익필(宋翼弼, 1534~1599)선생이 율곡에게 편지를 보내 사단과, 칠정, 인심과, 도심에 다른 견해를 보내는데 서인 중에 제일 태두(泰斗)였기에 구봉선생의 이론을 알아야 동인과 서인의 이론이 다른 이유를 알고 율곡만이 서인의 대표 이론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율곡과 구봉은 친구 이지만 스승 같은 친구였다.
구봉이 이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견해를 밝히는 내용 중 비유를 드는데 본성에서 감정이 나오는데 본성을 물이 고요한 근원이라 한다면 감정은 물의 움직임이다 물이 움직이면 쇠공의 세계로 들어온다.

물이 흐를 때 흐름을 사단이라 하고 칠정은 물이 흐를 때 파도 치는 것 까지 다 이야기 한 것이다.
칠정에서 선한 것은 편안하게 물이 파도 치면서 흐르는 선인의 즉 양심의 칠정이고 시끄럽게 물결치면서 흐르면 욕심의 칠정이고 악인의 칠정이다.

구봉은 사단과 칠정을 구분해서 이야기 하고 율곡은 사단을 따로 이야기 하지 않고 칠정 중에 선한 것 악한 것만 따져 놓았다.

구봉과 율곡은 사단 칠정에서 분명한 견해의 차이를 보였다 .
인심, 도심, 설에서도 김장생은 율곡에게 많이 배웠지만 구봉에게도 많이 배웠다.

김장생이 구봉의 제자인데 정당하게 밝히지 못하는 이유가 구봉 윗대가 노비 출신의 신분이며 구봉선생의 아버지인 송사련이 출세를 위해 안당과 안처겸을 모함하여 거짓 역모죄를 만들어 고발하여 안씨집안의 모든 가옥과 가산을 빼았아 안씨 집안을 멸문지화로 만들었던 장본인이다.(후에 안씨집안이 복원을 하고 다시 구봉의 집안이 노비로 전락하였다)구봉의 집안 내력의 이야기는 너무 길어 내용을 다 담지 못한다.

김장생은 율곡의 논변이 맞다고 보았다.
그러자 구봉이 김장생(1548~1631)에게 보낸 편지에서 희원(희원은 김장생의 자) 보시게, 소리, 색깔, 냄새, 맛을, 이해한 오감을 이에 발동한 인심이라 하고 인·의·예·지를 발동하는 것이 도심이라 이른다.

도심이 능히 인심을 다스려 공정함이 사사로움을 이기면 도심이 인심의 주인이 되고 사사로움이 공정함을 이기지 못하면 인심이 마음의 주인이 되어 인욕이 되어서 막을 수 없게 된다.
인심이란 대체로 인간의 신체적 기운에서 생기고 도심은 선천적인 본성에서 우러 나온 말이라고 이렇게 이야기 하면 되지 왜 인심을 자꾸 도심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하였다.
인심과 도심은 애초에 종자가 다르다고 보았다 구봉선생이 제일 자명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어느것이 주도권을 잡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율곡처럼 도심이 주도권을 잡았다 하여 인심이 도심처럼 다 같은 사단으로 보자는게 안 맞다는 이야기다.
현제의 시점에서 보면 어떤가 우리들은 인심 즉 욕망 하고 싶은 데로 살려고 한다 하고 싶은 데로 살려면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근대 사회는 내 뜻대로 살아 보자는 욕망이 너무 커졌다. 그 누구도 우리 욕망을 못 채운다 그것을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자본주의가 만들었다.
욕망은 바라는 것일뿐 하고 싶다고 다 하는게 아니다. 능력에 따라 할 수 있는것만 해야 하는데 그것이 도심이다.

도덕은 해도 되는가? 이다.
또한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하고 본성에 되물어 정당한 사유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인심과 도심의 구분이다.

도덕과 욕망 사이에 본성의 열기를 어디로 보낼 것인가.
500년 전 학자들의 인심,도심 논쟁은 현제와 미래까지도 우리들은 도덕과 욕망의 문제를 안고 갈등할 것이다.
개인의 이익과 권리를 요구하는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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