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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로(蛙利鷺)/유아무와 인생지한(唯我無蛙 人生之恨)

admin 기자 입력 2018.01.28 17:37 수정 2018.01.28 05:37

↑↑ 은헌기 회장
ⓒ N군위신문
고려시대(高麗時代) 18대 임금 의종께서 하루는 단독(單獨)으로 야행(夜行)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날이 저물었다. 요행(僥倖)히 민가(民家)를 하나 발견하고 하루를 묵자고 청하였으나, 집주인(李奎報 先生)이 조금 더 가면 주막(酒幕)이 있다는 이야기를하여 임금은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했다.

그런데 그집(李奎報) 대문(大門)에 붙어있는 글이 임금을 궁금하게 했다.(唯我無蛙 人生之恨: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게 인생에 한이다)
“도대체 개구리가 뭘까?”

한 나라에 임금으로서 어느 만큼의 지식(智識)은 갖추었기에 개구리가 뜻하는 걸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감(感)이 잡히지 않았다. 주막(酒幕)에 들려 국밥을 한 그릇 시켜 먹으면서, 주모에게 외딴집(이규보 집) 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과거(科擧)에 낙방(落榜)하고 마을에도 잘 안 나오며, 집안에서 책만 읽으면서 살아 간다는 애기를 들었다. 그래서 궁금증이 발동(發動)한 임금은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서 사정사정한 끝에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집 주인의 글 읽는 소리에 잠은 안 오고해서 면담(面談)을 신청(申請)했다.
그리고는 그렇게도 궁금하게 여겼던 “유아무와 인생지한(唯我無蛙 人生之恨)”이란 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옛날에 노래를 아주 잘하는 꾀꼬리와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꾀꼬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데 까마귀가 꾀꼬리한테 내기를 하자고 했다.
바로 “3일 후에 노래시합을 하자”는 거 였다.

백로(白鷺)를 심판(審判)으로 하여 노래시합을 하자고 했다.
이 제안(提案)에 꾀꼬리는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노래를 잘 하기는 커녕 목소리 자체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자신에게 노래시합을 제의하다니. 하지만 월등한 실력을 자신했기에 시합(試合)에 응(應)했다.

그리고 3일 동안 목소리를 더 아름답게 가꾸고자 노력(努力)했다.
그런데, 반대로 노래시합을 제의한 까마귀는 노래 연습은 안하고 자루 하나를 가지고 논 두렁의 개구리를 잡으러 돌아 다녔다.

그렇게 잡은 개구리를 백로(白鷺)한테 뇌물(賂物)로 가져다주고 뒤를 부탁한 것이었다.
약속한 3일이 되어서 꾀꼬리와 까마귀가 노래를 한 곡씩 부루고 심판인 백로(白鷺)의 판정(判定)을 기다렸다.

꾀꼬리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기에 승리(勝利)를 장담했지만, 결국 심판인 백로(白鷺)는 까마귀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한동안 꾀꼬리는 노래시합에서 까마귀에 패배(敗北)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백로(白鷺)가 가장 좋아하는 개구리를 잡아다 주고, 까마귀가 뒤를 봐 달라고 힘을 쓰게 되어 본인이 패(敗)한 사실(事實)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꾀꼬리는 크게 낙담(落膽)하고 실의에 빠졌다. 그리고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게 인생의 한이다”라는 글을 大門앞에 붙 혀 놓았다고 한다.

이 글은 이규보(李奎報) 선생(先生)이 임금한테 불의(不義)와 불법(不法)으로 뇌물(賂物)을 갖다바친 자에게만 과거급제(科擧及第)의 기회(機會)를 주어 부정부패(不正腐敗)로 얼룩진 나라를 비유해서 한 말이었다.

이때부터 와이로(蛙利鷺)란 말이 생겼다.
와(蛙) : 개구리 와
이(利) : 이로울 이
로(鷺) : 백로 로

이규보(李奎報) 선생(先生) 자신(自身)이 생각해도, 그의 실력(實力)이나 지식(智識)은 어디에 내놔도 안 떨어지는데 과거(科擧)를 보면 꼭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돈도 없고, 정승(政丞)의 자식(子息)이 아니라는 이유(理由)로 과거를 보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자신(自身)은 노래를 잘하는 꾀꼬리와 같은 입장이지만, 까마귀가 백로(白鷺)한테 개구리를 상납(上納)한 것처럼 뒷거래를 하지 못하여 과거(科擧)에 번번히 낙방(落榜)하여 초야(草野)에 뭍혀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이규보(李奎報) 선생(先生)의 품격(品格)이나, 지식(智識)이 고상(高尙)하기에 자신(自身)도 과거(科擧)에 여러번 낙방(落榜)하고 전국(全國)을 떠도는 떠돌이인데, 며칠 후에 임시과거(臨時科擧)가 있다하여 개성으로 올라가는 중 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 궁궐(宮闕)에 돌아와 즉시 임시과거(臨時科擧)를 열 것을 명 하였다고 한다.

과거(科擧)를 보는 날, 이규보(李奎報) 선생(先生)도 뜰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준비(準備)를 하고 있을 때 시험관(試驗官)이 내 걸은 시제(詩題)가 바로“유아무와 인생지한(唯我無蛙 人生之恨)”이란 여덟글자 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이규보(李奎報) 선생(先生)은 임금이 계신곳을 향해 큰 절을 한 번 올리고 답을 적어 냄으로서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차후(此後) 유명한 학자(學者)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와이로”(蛙利鷺/唯我無蛙 人生之恨)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군위군공군전우회 회장 은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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