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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어찌 이럴 수가

admin 기자 입력 2018.01.28 17:39 수정 2018.01.28 05:39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隔世之感을 느낀다. 신조어와 줄임말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세대다.
어찌 이럴 수가 외국어도 아닌 내 나라말을 할 줄도 모르고 알아듣지도 못한다. 세종대왕님은 알고 계실까?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소나무, 장구한 세월에도 절개를 잃어버리지 않고 버티어 서 있다. 소나무 볼 적마다 송구함을 느낀다.

사는 건 죽는 것보다 힘이 든다. 하지만, 입 있고 귀 있어도 매일같이 쏟아지는 신조어와 줄임말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 더욱 힘이 든다.

어렵사리 배울 만큼 배웠지만, 떳떳이 명함 한 장 내밀 정도도 못 된다. 그렇다고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만 들여다보고만 있을 수 없다.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아는 척하며 사는 것이 더더욱 힘이 든다.

어느 날 집사람이 나보고 당신 공수처 방문진 정대협 질본 블박차 탄기국 같은 줄임말을 아느냐고 묻는다. 알고 있는지 나를 시험해 보는 눈치였다. 내 나이가 어중간한 나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른다 하면, 날 가르쳐 주겠느냐고 하며 느닷없는 질문에 아는 척하면서 웃음으로 떼 붙였다.

그 후 신조어와 줄임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즐겨 보지도 않던 텔레비전 앞에 앉아 열심히 보고 듣고 했다. 들을 때는 알았는데 금방 잊어버리고 했다. 그런데도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무언가 잊어버린 것 같아 마음이 허전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느 날 SNS에서 발표한 2017년 신조어 능력평가를 시험해 보았다. 16개 중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가싶남, 남아공, 고답이, 우유녀는 우유남. 영고. 갓띵작 등등이다. 이를 기억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더 어려웠다.

신조어와 줄임말이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것 같았다.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생활화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본다.

정대협이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줄임말이다. 이는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서려 있는 말이다. 따뜻한 방 엄마 옷고름 잡고 세상모르고 잠자던 핏덩이가 무자비하게 일본군에 끌려갔다.

엄마는 끌려간 딸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애원했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딸을 그리며 덧없는 한세월을 허랑(虛浪)하게 보냈다. 핏덩이 같은 것이 무엇을 알겠나? 무서운 일본군 구둣발에 불안·초조·공포 속에 벌벌 떨며 밤낮 눈물로 지새웠다. 엄마는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딸 한번 보지 못하고 끝내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반세기 지났지만, 아직도 그 원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밝고 고운 빛깔이 어느새 세월을 못 이긴 듯 퇴색되어가고 있다. 이백여 명 넘게 끌려갔다. 지금까지 살아계신 할머니들 겨우 서른일곱 분이다. 지난 악몽을 되새기며 세상과 싸우고 있다. 살아생전 원한을 풀기를 기원한다.

어디에든 센스 있는 건배사는 그 사람의 인격과 품위를 한층 업그레이드해준다.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적당한 신조어와 줄임말을 구사할 줄 아는 지혜는 더욱 아름답다.
어느 연회석에 불현듯 건배사 제의를 받으면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나타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총회를 마치고 식당으로 갔다. 나이 때문에 늘 윗자리에 앉는다.
술잔도 제일 먼저 온다. 식사 도중 사회자가 건배 제의가 있겠습니다 한다. 권 선배님 건배 제의가 있겠습니다 한다.

나이가 많으면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데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생각했다. 일어서자마자 곧장 건배 제의하는 것도 그렇고 해서 잠깐 머뭇거렸다. 시선들을 한곳으로 집중시키기 위해서다.
시 적(詩的)도 아니면서 그렇게 하고 싶었다. 자기역량개발이다. 나는 오늘 밤 아름다운 꽃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향긋한 향기도 맡아 보았습니다. 젊음의 늠름한 기상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선후배를 사랑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믿음과 화합으로 건강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잘 살아 봅시다 하고 짧은 인사로 마쳤다. 그리고서 건배 제의했다. 제가 우리는 하면, 여러분들은 하나다라고 하십시오 했다. 내 딴에는 열심히 했는데 후배들이 무슨 말 할까 돌아보았다. 회원들이 말을 잇는다.

선배님! 집에서 준비를 많이 하셨네요 한다. 핀 찬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눈치 없이 그냥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다음은 회장의 건배 제의가 있겠습니다 한다. 인사한 후 저는 이렇게 건배 제의를 하겠습니다. 원하시는 것 모두 더 잘 풀리기를 기원한다며 “원더풀”한다. 재미있는 건배 제의였다. 내가 한 건배 제의는 단합과 화합을 내포하였지만 단순했다. 그러나 회장이 한 건배 제의는 행운유수(行雲流水) 같았다. 미래의 지향적인 꿈과 희망과 이상을 보여주며 멋있고 참신했다. 정말 멋있는 원더풀 이었다.

말도 나이를 먹는가 보다. 과거의 말들은 터프했다. 그러나 현재의 말들은 스마트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 속에서 나를 더듬어 나를 찾고 나를 발견했다. 신조어와 줄임말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세대에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이 든다 했더니 더더욱 힘이 든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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