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인물 독자마당

적막

admin 기자 입력 2018.03.12 16:00 수정 2018.03.12 04:00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잔설이 희끗희끗 남아있는 깊은 산골 동네 하나가 호젓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은 골목길에는 차가운 바람만 거세게 불어대고 있다. 오토바이 소리가 나면 우르르 모여들던 코흘리개 녀석들도 어디로 갔든지 찾아볼 수 없다. 허허한 깊은 산골 도깨비가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듯 음산하고 적막하다.

겨울 끝자락에 봄의 향연이 시작된다. 얼었던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가 지났다. 얼어붙었던 마음도 눈 녹듯 풀렸다. 우수가 지나고 보름이 되면 24절기 중 세 번째 절기인 경칩이 다가온다. 모든 생명이 꿈틀거리며 밖으로 나올 준비 한다.

개구리는 바깥세상 구경하러 겨우내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켠다. 버들강아지는 움트고 꽃들은 세상을 아름답게 꾸밀 만반의 준비에 여념이 없다. 벌과 나비들은 꿀 찾으러 떠날 채비 하느라 분주하다. 봄의 향연 준비에 덩달아 세상은 온통 야단법석을 떤다.

얕은 봄 햇살이 비치는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태어난 지 3일밖에 안 되는 어린 송아지가 젖을 먹지 않는다고 링거 한 대 놓아 달라고 부탁하러 왔다. 농촌에 송아지 한 마리가 큰 재산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는 빨리 서둘렀다. 달리면서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지난날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꽃망울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고 수양버들 잎은 파릇파릇 움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저 멀리서 아른거리는 아지랑이가 필 듯 말 듯 하며 내 마음을 흐리게 한다.
동네에 들어오는 큰 도로에는 도로가 파헤쳐질까 봐 자갈을 깔아 놓았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하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얼굴이며 옷이며 먼지투성이가 된다. 투정 없이 살아온 뒷모습을 그려본다. 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간신히 그 길을 지나 시원하게 뚫린 아스팔트 길 위를 신나게 달린다. 기분도 상쾌하고 마음도 상쾌하다. 산과 꽃과 나비가 한데 어울려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내 직업은 항상 그랬다. 아무리 춥고 더위도 주인이 나를 방으로 안내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어쩌면 마구간으로 안내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을지도 모른다. 수의사이기 때문이다. 마구간에는 송아지 한 마리가 힘없이 축 늘어져 숨만 헐떡이고 있다.

증상이 매우 심한 것 같다 하며 주인에게 설명한다. 링거를 꽂고 나니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늙은 쥐가 독 뚫는다 하더니만 원장보고 하는 말이구먼. 하고 웃긴다.

링거가 쉴 사이 없이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진다. 링거를 맞는 동안 송아지가 일어날까 봐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일어서려고 뻗대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링거가 들어가는 동안 나는 손을 뒷짐 지고 어슬렁어슬렁 걸음으로 이집 저집 들어가 보았다. 소 울음소리며 아이들 뛰노는 소리로 북적이던 동네가 텅 빈 것 같았다. 아이들 젊은이들 누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노인들만 덩그러니 집을 지키고 있었다. 마구간에는 소 한 마리 없고 마구간이 헛간으로 된 지 오래되었다. 마당에는 바람에 날려 온 부스러기가 군데군데 쌓여 있다. 쓸쓸하고 적적하기 이를 때 없다.

소 예방하러 가면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던 한 집 있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딸과 함께 남부럽지 않게 오붓하게 살고 있었다. 때가 되면 밥 먹고 가라고 하며 친절히 대해주고 했다.

행실과 범절을 보고 사람의 가치를 평하는 것 아니지만 가문이 좋은 집안이구나 생각했다. 그 집을 찾아가 보았다. 화려하고 근엄하게 살았던 흔적이 간 곳 없었다. 어느새 지붕 한쪽이 무너져 집이 볼 품었다. 몇 해가 지나면 남아 있던 지붕마저 무너질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좀 더 지나면 아무것도 없고 풀만 무성하겠다고 생각하며 허전한 마음으로 그 집을 나왔다. 삶의 허무함과 쓸쓸함이 잔잔한 내 마음에 엄습해 오는 것 같았다.

포근한 봄 햇살이 온 세상을 깨운다. 텅 빈 집만 덩그러니 있는 이곳 산골은 여전히 찬바람만 분다. 링거를 다 맞은 송아지는 눈 속에서 핀 매화처럼 차가운 봄바람 속에서도 네다리를 뻗대어 일어나 어미한테로 걸어간다. 아무도 찾지 않는 적막하고 쓸쓸한 마구간에서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 같았다.

얕은 햇살이 서서히 겉치고 햇볕이 내리쬔다.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이고 민둥산 계곡에 쌓였던 잔설도 녹아내린다. 삭막하고 적적했던 동네가 훈기가 나는 것 같다. ‘한 할아버지가 말씀하신다.’ 비록 우리 동네는 깊은 산골 적막하지만, 명절이 되면 아들딸 손자들이 타고 온 뻔쩍거리는 자동차로 온 동네가 북새통을 이룬다 하며 자랑한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저작권자 N군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