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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춘수 원장 |
ⓒ N군위신문 |
어찌이럴 수가! 알알이 영글었던 꿈이 한순간에 산산이 부서진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자두가 여기저기서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더 맛나고 빛깔 좋은 자두를 지어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지만, 보람도 없이 한 해를 보내야 한다. 어떻게 보내야 할지 걱정이 태산 같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문턱에 들어선다. 아직 겨울 끝자락에는 3월의 매서운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얼었던 땅이 따스한 봄기운에 조금씩 녹는다. 긴 잠에서 깨어난 나무들은 몸을 흔들며 기지개를 켠다.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움틀 준비를 하며 자두나무 가지에도 꽃눈을 내밀려 한다.
나뭇가지를 손질하는 시기가 시작되자 손길이 분주해진다. 허리춤에 작은 톱과 전지가위를 차고 밭으로 간다.
밤사이 내린 하얀 서릿발에다 손발이시러 얼어붙는 것 같다. 밭 귀퉁이에 불을 지피고 얼었던 손을 녹인다. 오래된 가지는 잘라내고 새가지는 남겨둔다. 가지에 다닥다닥 붙은 햇순이며 방향이 하늘 쪽으로 자라는 가지는 자른다.
햇볕과 통풍이 잘 안 되게 자란 거치적거리는 가지도 잘라 낸다. 힘들었지만 작업을 끝내고 둘러보니 마음도 후련하다. 볼썽사납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보기가 훨씬 더 좋았다. 봄맞이 준비를 끝내고 영근 채 오는 봄을 기다린다.
완연한 봄이 꽃과 나비에게 손짓한다. 꽃들은 피어 흐드러지고 나비와 벌들은 겨우내 만나보지 못했던 시간을 아쉬워하며 한 테 뒤엉켜 인사한다.
자두나무도 단장한 모습으로 향긋한 꽃향기를 뿜어내며 환한 웃음으로 인사한다. 세상이 온통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기쁨에 넘쳐 주체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때 갑작스럽게 기온이 영하권으로 뚝 떨어진다. 살얼음까지 얼고 쌀쌀한 날씨가 계속 이어진다. 화려하던 축제 분위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돼버린다.
풍년을 기약하며 열심히 살아왔던 숱한 시간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다. 꽃들은 쌀쌀한 날씨에 누렇게 시들어져 버렸다. 벌들도 어찌할 바 모르고 쩔쩔맸다. 자두 꽃도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피를 토하듯 울부짖는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앞이 캄캄했다. 애써 고통을 참으며 지금까지 묵묵히 지내온 시간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기약 없는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기침 발열 몸살로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고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생전 처음 119구급차로 병원에 입원했다.
담당 의사가 바이러스성 폐렴이라고 말하며 몇 주간 진료를 받아야 합니다 라고 했다. 매일같이 하는 일이라고는 체온 혈압 당뇨 혈액검사와 주사 맞고 약 먹고 폐 사진 찍는 일이 전부였다.
어느 때는 멍하니 천장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때도 있었다. 식구들이 걱정되었다. 애지중지한 소와 겨우내 땀 흘리며 가꾼 자두나무도 걱정되었다. 주위에 있는 지인들도 잘 지내고 있는지 이 생각 저 생각하며 잠 못 이루었다.
24절기 중 망종(芒種)을 며칠 앞두고 한 달 만에 퇴원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자두나무를 보고 망연자실했다.
자두나무는 한삼덩굴에 덮여 싸여 숨을 헐떡이며 꼼짝 못 하고 있었다. 덩굴을 걷어내고 나뭇가지를 보았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자두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그늘에 가려 햇빛을 보지 못했던 자두는 곰팡이가 하얗게 피어 냄새가 등천했다. 곰팡이가 필 때 쓰라렸던 고통을 생각했다. 가슴이 찡하고 울컥했다.
어떤 것은 물렁 죽데기가 되어 코끼리 가죽같이 쭈글쭈글한 것도 있었다. 그늘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고 빨갛게 익은 자두도 있었다. 모든 것 내 탓이었다. 내가 있었더라면 이러하지는 않았을 텐데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연민의 정이 갔다.
농사를 망쳤다는 이야기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잔인하게 망가질 줄은 몰랐다. 너무나 가혹하고 비참했다. 허전하고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하늘 보고 원망도 했다. 한때는 즐거웠다.
엊그제만 했어도 울긋불긋한 자두가 바람 따라 신기한 묘기를 보여주며 즐겁게 지냈다. 이제 넋 잃은 장승처럼 아무 말 없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팠다.
한번은 농산물공판장에서 자두를 팔아 본 적이 있었다. 자두 값을 받으면서 가슴이 떨리고 눈물이 핑 돌았다. 얼마나 될까? 천 원짜리 만 원짜리 한 장 두 장 넘길 때마다 고개를 끄떡이며 마음 졸이며 세어보았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돈을 만져보기는 처음이었다. 땀 흘리며 걷든 무거운 발걸음이 하늘로 날을 듯이 가벼웠다.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던 콧노래도 저절로 흥얼거리며 나왔다. 넓고 넓은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 순간이 깨어지지 않고 영원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호사다마란 말이 있다. 하마터면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다. 간신히 일어났으나 다리가 떨리고 힘이 쭉 빠졌다. 너희들이 살려달라고 애타게 손짓하는 것을 보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잃어버린 꿈을 그리며 애타게 기다려 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외롭고 쓸쓸한 마음 달래며 내년의 풍년을 기약했다.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