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인물 독자마당

빨갛게 익은 고추

admin 기자 입력 2018.08.19 18:29 수정 2018.08.19 06:29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폭염이 연일 맹위를 떨치고 있다.

뒷밭 고추밭으로 가는 꾸불꾸불한 길은 무성한 잡초들이 서로 뒤엉켜 길을 막는다. 고추밭에는 초록 잎사귀 사이로 고추가 빨갛게 익어간다. 줄기마다 대롱대롱 매달린 것이 부처님 오신 날 법당 천장에 연등이 줄지어 있는 형상과 같다.

팔공산 산기슭에 천여 평 남짓한 고추밭이 있다. 해가 뜰 무렵 산봉우리에서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불그레한 아침 햇살이 쏟아진다.

밭 귀퉁이에 있는 쪽박 샘에서 불어나오는 시원한 바람은 언제나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잊게 해준다. 아버지는 식사 후면 짬짬이 이런저런 마음속 이야기를 곧잘 한다. 한번은 예나 다름없이 긴 담뱃대 물고 담배 한 모금 빨아들이고 후~ 내 쉬면서 이야기한다.

뒷밭 고추밭은 가근방(近方:부근 일대)에서 제일 크고 고추가 잘 되는 밭이다. 가뭄이 거의 들지 않고 고추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다 잘되어 뭇 사람들은 이 밭을 은근히 탐내기도 한다고 한다.

40도 오르내리는 불볕더위가 계속된다. 새벽에 하는 일은 낮에 하는 일 절반을 한다고 한다. 빨갛게 익은 고추 따려고 아침 햇살이 오기 전 서둘렀지만, 어느새 햇볕이 고추 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밤새 내린 이슬로 고추밭은 습기로 눅눅하다. 해맑은 아침 햇살에 고추이파리 사이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안개는 환상적인 물안개 형상과 같다.

눅눅한 땅에서 올라오는 텁텁한 습기와 열기는 수건으로 입과 얼굴 가리고 모자를 푹 눌러 썼지만 감당할 수 없다. 온몸은 땀에 젖어 뒤범벅되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은 닦아도 닦아도 끝없이 흘러내린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고추 한 부대를 겨우 따서 밭둑으로 들고나오니 숨통이 터질 것만 같다.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팔공산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선들바람이 땀에 흠뻑 젖은 온몸을 식혀 준다.

땀의 결실은 폭염이 내리쬐는 한여름에 이루어진다. 5월 초순 밭 갈고 고르고 고추 모종을 심는다.

고춧대가 올라오고 고춧대에 가지가 나고 잎이 피고 7월 하순부터 붉은 고추가 주렁주렁 달린다. 볼수록 사랑스럽고 탐스러우며 피로를 잊는다. 이러한 생각도 잠시, 기쁨과 걱정으로 만감이 교차한다. 저 많은 고추를 언제 다 내어야 할지 엄두도 나질 않는다. 할 일은 태산 같은데 장마가 들이닥치면 어떡하지?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다.

고추는 생긴 대로 성격도 급하고 화도 잘 낸다. 폭염이 내리쬐는 한여름 8월이면 붉은 치마에 머리를 옥색으로 감아올리고 황금 주머니를 차고 시집갈 준비를 한다. 주인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늦는 날이면 벼락이 난다. 고추는 부글부글 끊는 자기 속을 못 새겨 스스로 물러 터져버린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다. 사람을 꼬랑테 먹여도 유분수지 조금 늦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정신이 똑바로 박힌 녀석들은 곱게 단장하여 한껏 자태를 뽐내며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유혹하며 서리가 내릴 때까지 기쁨을 즐기고 있다.

전국이 불볕더위로 아수라장이다. 기상관측 이래 111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 39.6도 홍천 41.0도로 사상 최악의 기록적인 폭염이 계속된다. 펄펄 끊는 도로에 살수차가 쉴 사이 없이 다니며 물을 뿌린다. 폭염도 자연 재난에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더위에 못 이겨 쓰러지고 탈진상태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여름이 되면 찬물에 식은 밥 말아 된장에 빨갛게 익은 생고추를 푹 찍어 먹으면 속이 금방 시원해진다고 하시던 아버지 말씀이 생각난다.

아버지 밥상에는 빠짐없이 빨간 생고추 서너 개 올려있다. 아버지는 식사하시면서 서너 개를 맛있게 잡수시고 식사를 마치신다. 얼굴은 불그레하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아버지! 맵지 않으세요?” 하고 물었다. 푸른 생고추보다 덜 맵고 달짝지근하다 하시며 한번 먹어 보라 한다. 멋모르고 먹었다가 입안이 터져 죽는 줄 알았다. 한참 동안 입안이 얼얼하고 어쩔 줄 몰랐다.

여름이 되면 늘 생각이 난다. 어릴 때 먹었던 고추의 매운맛 아직도 입안이 얼얼하다.
훈련소에서 훈련받을 때였다. 교육장을 옮겨가면서 훈련을 받는다. 다른 교육장으로 가는 길 바로 옆에 고추밭이 있다.

빨갛게 익은 고추가 탐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아버지가 빨간 고추가 푸른 고추보다 덜 맵고 달짝지근하다 하시며 먹어 보라 하시기에 먹었다가 혼이 났던 일이 번개같이 스쳐 지나간다.

고추를 보기만 해도 입안에서 군침이 돌고 침이 저절로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견물생심이라 하였던가. 따고 싶은 마음이 충동질한다. 가슴이 쿵덕거리고 숨소리마저 거칠어지고 가빠진다.

따고 싶은 마음을 알아차린 듯 뇌(腦)가 명령한다. 밭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밭 전체를 철조망으로 촘촘히 둘러쳐 있어 들어갈 틈이 없다. 포기했다. 고양이가 생선가게에 들어가서 고기 한 점 못 먹고 돌아오는 꼴이 되어 버렸다.

내무반에 돌아와서 낮에 일어났던 일을 곰곰이 생각한다. 폭폭 찌는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른 새벽부터 종다래끼를 허리춤에 차고 고추 따던 어머님 얼굴이 떠오른다. 분명히 이 밭 주인집에도 우리 어머님 같은 분이 이른 새벽에 땀 흘리시며 고추를 따시겠지 하는 마음이 든다.

철조망이 없었더라면 마(魔)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처지가 될 뻔했다. 빨갛게 익은 고추 먹고 싶었지만 따오지 않았던 것이 참으로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


저작권자 N군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