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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식물의 세계

admin 기자 입력 2019.07.17 10:38 수정 2019.07.17 10:38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지난해부터 화분에 심은 식물이 눈에 들기 시작했다.
여름 꽃, 동자꽃·엉겅퀴·털중나리·마타리·풍접초·참취가 야생화로 뽐내던 작년 이 맘 때다.

잠시 외출했다 집안에 들어섰으나 아내가 보이질 않았다. 이웃에 갔었거니 하고 있는데 베란다에서 화초를 정성스레 화분에 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 본 듯한 풀꽃이었다. 무슨 귀한 꽃이기에 그리도 정성들여 심고 있느냐고 물었다. 사실은 아파트단지 화단에 누가 버렸는지 바닥에 처박힌 풀뿌리가 가엽기도하고 안쓰러워서 가져다 심는 것이라고 했다.

살다보면 싱싱한 화분들을 선물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꽃가게에선 잘 자랐던 식물인데 반해, 환경이 바뀐 실내에서 키우기가 힘들다는 건 수많은 화초들이 죽은 후 가꾸기가 어렵다는 걸 실감 한다. 어떤 건 말려 죽이고, 어떤 건 물주기로 사랑이 지나쳐 뿌리가 썩어 죽이기도 한다. 식물에게 햇빛이 필요하지만 과하면 잎을 말라 죽기도 한다.

식물마다 다 다르고 또 몰라서 귀한 생명을 지켜 주지 못할 때도 있다. 내가 식물을 잘 키우지 못하기 때문에 예뿐 꽃이라도 선뜩 키울 생각을 머뭇거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만큼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은 귀중한 것이라 양축養畜하거나 양묘, 양목하기가 여간 어렵지가 않다. 누구든 화초를 키울 자신이 없으면 키우지 말든지 아니면 화초를 좋아하는 이웃에게 줬으면 고맙다는 인사도 받고 좋았을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누군지 몰라도 화분채로 버리자니 화분은 아깝고 식물의 생명쯤은 하잘 것 없는 냥, 살아 있는 화초를 뿌리 채 알몸만 쏙 뽑아 쫓아내 듯 버리다니 참 매정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성미性味 고약한 그 사람은 필시 식물의 저승사자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도 일각을 다투든 화초의 생명을 귀히 여겨 급하게 심어 준 아내의 심성이 고마웠다. 그날 난데없이 들인 식물이 내겐 처음으로 입양한 반려식물로 우리 집 정원에 화초의 일원으로 들여 온 셈이다.

반려伴侶, 표준국어사전은 ‘짝이 되는 동무’라 풀이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일 테다. 애완愛玩의 대상이든 이렇듯 인격체로, 생명체로 대접 받는 관계로 바뀐다. 생각지도 않던 업둥이 풀꽃이 온 가족의 돌봄으로 푸르게 잘 자라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난해 추석이 갓 지난 어느 날 아침 빨강 꽃이 한 다발 피운 것을 보게 됐다. 무슨 꽃인가 깜짝 놀랐다.

간발間髮의 차로 생명을 건진 그 가엽던 그 풀꽃이 꽃을 피우다니 믿기지 않을 만큼 신기神奇했다. 하마터면 꽃 한 번 피워보지 못하고 생명을 잃고 일생을 마칠 뻔 했던 화초가 아닌가.
이토록 아름답게 핀 꽃이 대체 무슨 꽃인지 지인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면서 무슨 꽃이죠? 물어봤다. 예쁜 ‘제라늄이네요’ 이름을 알려줬다.

선홍빛 붉은 제라늄, 아프리카 남부지역이 고향인 걸 알았다. 검은 대륙을 떠나 인도양을 건너 이민 온 식물이다.

제라늄은 유럽 사람들이 좋아하고 방충효과와 더불어 불운을 막아 주는 액막이 용도로 창가에 두는 꽃으로 유명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꽃말은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당신의 생각이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고 하니 정감이 들어 껴안아 주고 싶었다.

꽃피는 기간도 짧게는 3개월 길게는 9개월까지 핀다지 않는가. 지난해 9월말부터 피기 시작한 꽃이 지금까지 10개월째 피고 지고 있으니 ‘경이롭다’고 해야겠다. 작년 가을부터 꽃을 피우니 꽃도 힘들어할 것 같아 이젠 좀 쉬어라하고 제라늄에게 수없이 토닥거리기도 했다.

여름 내내 피고도 지치지 않고 100일 동안 피운다는 배롱나무의 꽃, 백일홍이 제라늄 앞에선 얼씬도 못할 지경에 이를 것 같다.

뜻밖에 입양하게 된 제라늄이 꽃을 피운 후 우리 집 베란다 화원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순덕한 종부宗婦가 두꺼비 같은 장손이라도 순산한 듯 정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오래전부터 뿌리박은 터줏대감 화초들을 변방으로 슬슬 밀어내고 안방을 꿰차고는 칙사 대접을 받고 있다. 햇빛 따사롭고 바람이 들락거리는 최고의 명당자리에 뿌리까지 내렸으니 말이다.

나와 아내는 귀염둥이 제라늄을 향해 하루하루 사랑의 눈빛을 아낌없이 보낸다. 볼 때마다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활짝 피운 꽃송이로 꽃 춤을 춘다. 정 주고, 예뻐하니 꽃도 수줍은지 늘 발그레하게 피고 있다.

생명을 이어준 보답인지, 사랑을 듬뿍 건넨 대가인지 아리송하다. 하나 식물도 사랑한다는 걸, 좋아하는 걸 귀신 같이 알아 가끔은 우둔한 사람보다 훨씬 영민英敏하여 요물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뿐인가. 식물도 빛을 느끼고, 몸을 기울기도 하고, 외부 충격에 몸을 움츠리는 등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일 년 내내 정치 논쟁으로 시끄러워야할 여의도 의사당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패스트트랙만 주장하고 일하지 않는 ‘식물 국회’라는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과연 식물이 아무 일도 안 하고 꿈쩍도 하지 않을까. 묵묵하고 정직한 식물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간사에 비유하나 싶어 기분이 영 그렇다. 식물은 그렇지가 않다.
생존경쟁을 위해 죽기 살기 일을 한다.

태양을 향해 움직이는 해바라기, 이른 아침 해가 뜨면 기상나팔이라도 불 것처럼 활짝 피었다가 해질 무렵 오므리는 나팔꽃, 바람에 날려 보내는 민들레 꽃씨를 봐라. 사람이 제 새끼를 훨훨 날려 보낼 수 있겠나.

땡볕에 절벽을 기어오르는 푸른 담쟁이의 의지는 어떤가. 펄펄 끓은 양철지붕을 맨손으로 움켜잡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밀며 당기며 눈물겹게 오르지 않던가. 그런데도 식물이 아무 일 안 하고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나.

우리 집 제라늄도 가만두면 꽃만 피우지만 이파리를 건드리거나, 꽃대를 슬쩍 스치기만 해도 금방 낌새채고 강한 냄새를 풍겨 해충들 근처엔 얼씬 못하게 한다. 얼마나 영특하고 갸륵한가.
어떤 식물이든 종족의 보존을 위해, 자손의 번식을 위해 아무데나 쉽사리 타협하지 않고 아주 대차게 승부를 걸고 있는 듯하다.

미욱한 식물이 뭘 알겠느냐 하지만 인간이 너무나 모르고 하는 소린 것 같다. 비록 사람과 언어로 소통하진 못해도 식물은 온몸으로 소통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과의 대화나 생활에서 겪는 충돌과 불안, 집착은 식물과의 소통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식물은 보기만 해도 이심전심으로 우리 내면을 푸르게 정화해 주는 것 같다.
단연코 식물이라고 하찮게 대할 일은 아니다. 하니 ‘식물 국회’라는 말은 국회를 조롱 한다 기 보다 식물을 모독하는 거라 생각한다. 식물인간이라는 말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르고 키우기로 했다면 실내식물도 살아 숨쉬는 ‘반려가족’으로 대접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작년 가을부터 입양한 제라늄의 꽃을 보면서 자연의 섭리에 마음 자락 적시는 즐거움이 적지 않다. 요즘, 아내가 거둬들인 제라늄과의 만남, 주거니 받거니 사랑의 밀어密語 같은 재미에 푹 빠져 한 여름에도 즐거운 세월을 보내고 있다.

황성창시인
부산연제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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