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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자두에 얽힌 사연

admin 기자 입력 2019.08.18 18:54 수정 2019.08.18 06:54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때아닌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늦겨울, 자두밭에 가는 길이다.
매서운 찬바람 한 줄기가 얼어붙은 뺨을 사정없이 할퀴고 간다. 봄이 온다고 한껏 기대에 부풀었던 나무들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황소바람마저 얼어붙은 마음을 더욱더 얼어붙게 한다.

자동차로 10여 분가량 달리면 야트막한 산비탈에 동네가 하나 있다. 그곳에 몇 평 남짓한 자두밭이 있다. 5백여 평 되던 밭이 시설물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몇 평 남짓하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농장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다. 아버지 따라 벼농사는 지어봤지만, 자두 농사는 처음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농사라 했던가? 마음만 앞섰지 남모르는 고생도 많았다.

봄이 오는 소리가 요란하다. 목련 개나리 진달래 등이 꽁꽁 얼어붙은 추위를 뚫고 꽃망울을 터뜨린다. 꽃이 탐스럽게 핀 나무는 열매도 많이 맺는다. 무엇이 못마땅한지 자두나무는 움쩍하지 않는다. 꽃을 보고 한해의 농사를 가늠하는데 꽃눈이 얼었을까 걱정된다. 나무 밑에 낙엽을 끌어모아 불을 지펴준다.

4월 되면서 살구 자두 매실 복숭아나무들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밭에도 하얀 자두꽃이 피기 시작한다. 며칠이 지나면 거의 다 필 것 같다.

들녘에는 향긋한 꽃냄새와 풋풋한 흙냄새가 진동한다. 길 잃은 까마귀 한 마리가 청명한 하늘을 빙빙 돌며 무엇에 쫓기는 듯 깍깍거린다. 얼마나 돌았던지 머리를 땅으로 향하고 쏜살같이 날아와 나뭇가지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옆도 돌아보지 않고 크고 빨갛게 익은 자두를 마구 쪼아댄다. 돌을 집어 던져도 꼼짝하지 않는다. 눈만 말똥말똥하게 뜨고 나를 한참 노려보다 얼굴에 똥을 싸고 날아가 버렸다. 퉤퉤 거리며 일어나보니 꿈이었다.

까마귀는 흉조라는 말이 있다. 까마귀 꿈을 꾼 탓인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지난해는 병원 생활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올해도 그럴까 봐 걱정되었다. 봄이 시작되자마자 일찍 서둘렀다.

지심이 키만큼 자랐던 자두밭은 깔끔했다. 나뭇잎은 시커멓고 번지르르하며 생기가 넘쳐흘렀다. 꽃이 지고 그 자리에 콩알만 한 열매가 조롱조롱 맺혔다. 열매를 만져보면서 감회가 남달랐다.

아무나 지을 수 없는 농사라 생각했는데 나무에 생명이 매달려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보고 신기했다. 풍년이 들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흐뭇했다.

어머니는 이웃을 가까이하며 지내셨다. 가을이면 배추 무 등 김장용 채소가 마당 한 귀퉁이를 차지한다. 이웃 사람들이 거들어 줄 때면 어머니는 늘 그랬다. “고맙네, 수고했네” 하면서 한 보자기씩 싸 준다. 남을 보살펴 주는 어머니의 배려심 밑에서 자란 나는 모름지기 몸에 배었다. 자두를 수확할 때면 절로 신이 난다.

맛은 별로 없지만 맛이나 보게 하며 자두를 한 소쿠리 담아 들고 이웃집에 나누어 준다. 잘 먹겠습니다 한다.

이를 때마다 기분이 좋아 어깨가 으쓱해진다. 사는 게 별것 있나? 사는 멋과 맛 따라 살면 되는 것이지 별다른 게 있나? “고맙네, 수고했네” 하면서 자상하고 따뜻한 어머니의 참사랑을 보면서 그렇게 살고 지낸다.

자두가 빨갛게 익어가는 고즈넉한 어느 오후였다. 일상사 일하다 왼쪽 다리 골절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거울 알 같이 맑았던 자두밭은 한순간에 잡초가 우거지고 사람이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나무는 환삼덩굴에 뒤덮여 금방이라도 숨이 멈출 것 같았다. 싱싱하던 나뭇잎은 시들어 말라 땅바닥으로 곤두박질한다. 탱글탱글하던 자두는 온데간데없고 쭈글쭈글한 모습으로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억장이 무너지고 꿈도 마음도 산산조각이 났다. 농사를 잘 지어 기억나는 사람들에게 보내드리고 싶었다. 찔 뚝 거리는 걸음으로 죽어가는 나무에 물을 뿌려주고 약도 쳐 주고 나무를 덮고 있는 환삼덩굴도 벗겨 주었다. 시들어졌든 나무에 생기가 돋고 활기가 넘쳐흘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던 자두도 제 모습을 찾았다. 나무들이 꿀꺽거리며 물 넘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땅이 꺼지도록 내려앉던 한숨도 진정되었다.

생사 갈림길에서 살아난 나무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휴~ 하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모든 과일이 다 그렇듯 자두도 오랫동안 비를 맞으면 새콤달콤한 맛이 덜하고 껍질도 물러 터지는 성질이 있다.

먼 곳 가까운 곳에 사시는 분들에게 자두 맛을 보이려고 했는데 기상청에서 이번 주말까지 장마가 계속된다고 하니 걱정이다. 겨우 살아난 나무는 엎친 데 겹친 격 꼴이 말이 아니다. 새벽부터 내리던 비는 그 칠 줄 모르고 계속 주룩주룩 내린다. 원망스러운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아도 본척만척한다.

자두는 나뭇가지 끝에 달린 것이 크고 빛깔도 좋고 맛이 난다. 그런데도 올해 자두는 탐스럽고 먹음직스럽게 보이지만 맛이 나지 않는다. 답답하여 이웃집에 물어봐도 역시나 그렇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내고 싶은 마음은 한결같았다. 걱정되면서도 마음속 깊이 간직한 분들께 보냈다. 한참 동안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던 중 절친한 친구한테서 선물 잘 받았다 하며 전화가 왔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기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맛이 없어도 있는 척 인사치레인 같아 더욱 불안했다.

봄이면 농사를 잘 지어 친척과 소중한 분들에게 전하고 싶다. 그러나 농사는 투기이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장마에 지은 농사는 빛과 맛 그리고 향기가 한꺼번에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 보냈던 일이 있다. 미련과 후회가 가슴 깊은 곳에 켜켜이 쌓였다. 차라리 보내지 말 걸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후회는 아름답다’라는 말을 믿고 다시 봄을 기다린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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