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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족보

admin 기자 입력 2019.09.03 10:37 수정 2019.09.03 10:37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책장 위에 하얀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다. 볼 일 없어 그냥 지냈던 탓인지,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까만 바탕에 쓴 황금색 글씨가 선명한 족보가 빽빽이 차 있다. 바깥세상을 오랫동안 구경하지 못해 종이는 쭈글쭈글하고 특유의 종이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아버지는 족보가 없으면 뿌리 없는 집안이라고 말씀하시며 보물같이 여기셨다. 6.25 전쟁 때 족보를 궤짝에 넣어 물이 새어 들어가지 않게 단단히 해서 집 뒤 나지막한 언덕 밑에 구덩이를 파고 깊게 묻었다.

전쟁이 남긴 상처에 아버지는 망연자실했다. 그 자리는 폭격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빛바랜 종잇조각 한 장이 나뭇가지에 걸려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아버지는 탄식하시며 근심 걱정에 싸였다.

피란길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집은 불에 타 없어지고 뼈대만 앙상히 남아 있었다. 급한 대로 타다 남은 서까래를 이리저리 걸치고 겨우 움막 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초겨울 중절모에 안경을 쓴 초로에 접어든 낯선 사람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아버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중절모를 벗고 “저는 안동 권씨 대종회 종무 위원 권 아무개입니다. 전쟁 후 새 족보를 만들기 위해 이 지역을 맡은 담당자입니다” 하며 자기소개를 한다.

그제야 아버지는 안심하신 듯 밝은 얼굴로 반가이 마중하셨다.
그 후 우리 집은 족보 하러 오는 사람들로 북적이었다. 어린 마음에 나는 그 사람을 싫어했다. 동네에 권 씨 집이 여럿이 있는데도 하필이면 왜 우리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작업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음에도 당연하다는 뜻인 듯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어머니는 양식 때문에 걱정하시고 아버지는 쌀쌀한 초겨울인데도 윗목에 앉아 계셨다. 그 사람은 족보를 만든다는 이유로 아랫목에 턱 거니 앉아 있는 모습을 참아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도 화가 분기탱천하여 견딜 수 없었다. 어른들이 하는 일에 참견할 수도 없고 애만 탔다.

족보는 노인들의 전유물이 된 지 오래다. 자식들에게 족보 이야기를 꺼내려 하면 인상이 찌푸려지고 알려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섯 손가락이 길고 짧은 것처럼 자식들의 생각도 제각기 사뭇 달랐다. 다행히 둘째 큰집 조카가 관심이 있었든지 이야기를 슬쩍 꺼냈던 일이 생각났다.

그 후부터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고 조카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 없었다.
추석날 조카가 식구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큰방에 둘러앉아 그동안 일어났던 자질구레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평소 입이 무겁던 조카도 그날따라 이야기가 많았다. 직장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한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 열심히 듣는다.

한 동료가 족보에 관하여 재미있게 이야기했던 것을 소설 읽듯 열심히 토로한다. 동료는 손바닥만 한 가첩(족보)을 꺼내 들고 우리 시조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지냈다.

자기는 몇 대손이며 내 자식들은 몇 대손이다. 내 이름도 가첩에 올려져 있다고 하며 자랑하는 그 사람의 말에 부러운 듯한 얼굴을 하며 말을 맺는다.

족보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조카에는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동료 직원은 이를 다 알고 있었지만, 조카는 몰랐기 때문이다. 창피라기보다 비굴하고 심술 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족보 이야기에 기죽은 조카는 어디에 가든 아무 말 못 하고 늘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생각하면 속상하겠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잘된 일인 것 같다.

대대로 내려온 집안 내력과 뿌리를 몰랐다는 것은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하기에 오늘과 같은 이런 창피를 보지 않았던가? 식견과 혜안을 가지고 깊이 헤아릴 줄 아는 그런 후손이 되기를 조상님들은 바라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람은 완벽하게 살 수 없다. 하지만 불완전하게 살면서도 완벽하게 살아보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어린 시절 나도 그랬던 일 있었다.
족보는 모두 한자로 되어 있어 읽을 수 없었다.
읽을 수 있는 한자라고는 고작 내 이름 석 자뿐이었다. 그럼에도 읽는 척하며 족보를 이리저리 넘겨보았던 것을 생각하면 가관이고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세상은 요지경이라 하더니 참말로 요지경 세상에 산 것 같았다.
피란 후 족보를 만들었는지 40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족보에 올리지 못한 형제자매 조카들이 많아 제가 학위 받는 기념으로 새 족보를 만들 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다. 수백여 권을 발간해서 집안 모든 분께 보내드렸다.

그리고 자식들이 출가할 때도 잊지 않고 족보 함에 넣어 보냈다. 떠나보내면서 “애야! 황금색으로 “안동권씨부정공파세보” 라고 쓴 족보를 책장 맨 위 칸에 꽂아두어라.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네가 안동 권씨 자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정받을 것이다”하며 일러 주었다.

어느 날 조카에게 ‘족보는 가문의 뿌리이다.’ 하면서 족보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장롱 속 깊이 넣어둔 가첩을 꺼내 들고 이 가첩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것인데 너희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나에게 전해주신 것이다.

잘 보관해서 조상님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니 자손 대대로 전하도록 하여라. 하면서 조카에게 신신당부하며 전해 주었다. 조카의 얼굴에는 어느 때보다 해맑고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현대에서 옛것들이 서서히 사라지는 지금, 아직도 그것을 찾고 있는 조카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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