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인물 독자마당

빈자리

admin 기자 입력 2019.09.22 19:31 수정 2019.09.22 07:31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세월이 유수와 같다.’라고 하더니 그런가 보다. 친구가 떠난 지가 벌써 두어 달이 지났다. 사람들은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도 낯선 길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아무 연고도 없는 먼 그 길을 왜 갔는지 허전한 마음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추석이 다가온다. 어느 때보다 친구 생각이 더 간절하다. 대학 다닐 때였다.
우리 집과 친구 집은 지척의 거리에 있었다. 시험 칠 때면 그 집에서 밤샘 공부하며 지낸 적이 있었다.

한 번은 학기말 시험이 있던 날이었다.
밤이 이슥할 무렵 친구 어머니가 소반에 간식을 들고 들어오셨다.

자식에게 베푸는 어머니의 보살핌에 놀랐다. 내가 대학 입학시험 준비할 때 밤샘을 수 없이 했어도 우리 어머니는 애달아하시면서 마음뿐이었다.

농사일에 지쳐 자식을 돌볼 겨를이 없다지만, 친구 어머니를 보면서 철딱서니 없는 아이처럼 부럽고 질투가 났다.

여느 때와 같이 친구 집에 놀러 갔다. 늘 조용했던 큰방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고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친구가 에둘러 말하길, 얼마 안 있으면 누나가 시집을 가는데 사교춤 정도는 출 줄 알아야 하지 않겠나 하며 아버지가 춤 강사를 불러 춤을 배우게 한다고 했다. 진작 말하지 않고, 생소한 이야기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득히 먼 이야기와 같았다.

우리 집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빗자루 들고 다리몽둥이가 뿌려지도록 때리고 당장 쫓아낼 것 같다.

그럼에도 인격과 도덕 그리고 지성을 두루 갖춘 자식으로 키우시려고 애쓰시는 친구 아버지를 보면서 좋은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무명 회(會)란 이름으로 50여 년 동안 변함없이 지내왔다.
회원은 일곱 명이며 부인 회원도 있다. 언제나 그랬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만난다는 것이 그저 기쁘고 즐겁다. 어느 때는 나이답지 않게 마음도 설레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때도 있다.

어디에 갈 때면 차도 세차하고 윤이 나게 반들반들하게 닦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걷어 올리고 거울 앞에 서서 볼품없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가며 비춰본다. 제멋에 사는 세상이라지만 꼴불견도 이런 꼴불견 있을까 하면서도.

그가 떠난 후 첫 모임이 있는 날이다. 여느 때와 같이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오늘따라 마음이 상쾌하지 않고 기분이 착잡했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 송구해서 인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일도 많이 일어난다. 암소가 발정이 와서 수정하던 중 뒷발에 차여 정강이뼈에 금이 나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친구가 마지막 떠나는 길에 참석하지 못한 내 심정을 전할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참석했다. 삶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던 부군을 잃어버리고 슬픔에 잠긴 부인도 어렵사리 참석했다. 그를 떠나보낸 후 첫 모임이다. 서먹서먹했다.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될는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여느 때와 같이 잘 지냈든지 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마음뿐 그렇게 할 수 없어 답답했다. 무거운 심정으로 부인의 얼굴을 간간이 훔쳐보았다.

그 옛날 밝은 표정 웃는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핼쑥한 얼굴에 근심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하고 아쉬움만 남긴 채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와 같이 지냈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었다. 장마가 계속되는 어느 날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자기 별장으로 우리를 초대 했다. 느닷없는 초청에 영문도 모르고 이야기만 듣고 출발했다.

처음 가는 길이라 낯설고 길 설어 빨리 달릴 수 없었다. 그날따라 천둥·번개가 하늘을 밝혔다 어둡게 했다 하며 굵은 장대비가 그칠 줄 모르고 쏟아졌다.

시각은 아직 오전인데 산기슭에 닿자 어슴푸레해진다. 비는 끝일 줄 모르고 계속 퍼붓는다.
계곡에서 흐르는 붉은 황토물이 바위에 부딪히면서 아픔을 호소하며 찢어질 듯한 괴성을 지르며 쏜살같이 내려간다. 조용한 산속 여기저기서 지르는 괴성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긴장되고 슬그머니 겁이 난다. 산 중턱쯤 올라가니 어둑어둑해 라이트를 켜지 않고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다.

그때만 해도 피가 한창 끓을 때이다. 하지만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사방이 컴컴하고 인기척 없는 외로운 산길을 달릴 때는 무서웠다. 손발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금방이라도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집사람이 옆에 타고 있다지만 무섭다고 말할 수 없고 혼자 속앓이하며 달렸다. 산허리를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길 따라 산등성을 넘고 또 넘어야 했다. 생각만 해도 아득하고 가슴이 답답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긴장과 피로에 비까지 겹쳐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서로가 쳐다보면서 오는 도중에 애먹고 고생했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친구가 빗속에 먼 길 찾아오느라 고생했다 하며 준비해놓은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서로를 위하여 건배하고 오찬을 즐겼다.

빗속에 잔잔한 음악이 깔리고 칙칙하던 분위기가 서서히 살아났다. 조용히 흐르던 음악이 거센 파도를 타고 피로에 지친 모두의 마음을 들쑤셨다. 친구는 특유의 몸짓으로 웃음을 자아내며 분위기를 살렸다.

웃음꽃이 활짝 핀 그 속에서 우리는 화목을 다짐하며 한 덩어리가 되었다.
즐겁고 행복했던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없는 슬픔과 후회가 한꺼번에 몰아닥쳐도 죽음 앞에는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등바등하며 살지 않은 그의 초연한 성격, 덤덤한 멋에 풍기는 그의 모습은 언제나 보아도 한결같았다. 친구가 떠난 빈자리에는 그가 남긴 체취가 물씬 풍긴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저작권자 N군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