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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남계서원에 배향된 서애 류성룡

admin 기자 입력 2019.09.22 19:33 수정 2019.09.22 07:33

↑↑ 홍영선 재무사
ⓒ N군위신문
세계문화유산으로 ‘한국의 서원’ 9곳이 등재된 가치는 유형물인 건축물과 무형인 제향기능등이 모두 공존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형태로 지속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편적 가치’ 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안동의 ‘병산서원’에 배향된 서애 류성용 선생이 군위 ‘남계서원’에도 주향으로 모셔져 있음으로 서애선생의 사후 조정의 사관(史官)이 평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졸기(卒記)를 살펴 볼 의미가 있어 전재코저 한다.

『선조실록』 에, 1607년(선조40) 5월 13일. 전, 의정부 영의정 풍원부원군 류성룡(柳成龍)이 졸(1542-1607년)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유성룡은 경상도 안동 풍산현 사람이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영오(穎悟) 하였으며, 기상은 단아(端雅)했다.

어린 나이에 퇴계 선생의 문하(門下)에 종유(從遊)하여 예로써 자신을 단속하니 보는 사람들이 큰 그릇으로 여겼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가 날로 드러났으나 아침 저녁 여가에 또 학문에 힘써 종일토록 단좌(端坐)하여 조금도 기대거나 다리를 뻗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응접(應接)하는 즈음에는 고요하고, 단아하여 말이 적었고, 붓을 잡고 글을 쓸 때에는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뜻을 두지 않는 듯 하였으나 문장이 정숙(精熟)하여 맛이 있었다.

여러 책을 박람(博覽)하여 외우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희 알아 한 글자도 잊어 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정밀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명나라 북경에 갔을때 중국의 선비들이 모여들었으나 비난하지 못하고 모두 ‘서애선생(西厓先生)’이라고 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명예와 지위가 함께 드러나고 총애(寵愛)가 융숭(隆崇)하였다.
서애는 조정에 출사 한지 30여 년 동안 재상으로 있는 것이 10여 년이었는데 임금의 총애가 조금도 쇠하지 않아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들었다. 경연(經筵)에서 선한 말을 올리고, 임금의 잘못을 막을 적엔 겸손하고 뜻이 극진하였다. 이 때문에 임금이 더욱 중히 여겨 일찍이 말 하기를 “내가 류모(柳某)의 학식과 기상을 보면 모르는 사이에 심복(心服) 할 때가 많다”고 했다.

또 『선조수정실록』에 기록 하기를 병인년(1566년)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경연에 출입한 지 25년 만에 드디어 재상(宰相)이 되었다.

당시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咨文)과 게첩(揭帖)이 밤낮으로 폭주하고, 각도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간찰(簡札)이 모여들었는데도 서애가 좌우로 수응(酬應)함에 그 민첩하고, 빠르기가 유수(流水) 같았다.

그 당시 낭관(郎官)인 신흠(申欽)으로 하여금 붓을 잡고 부르는 대로 쓰게 하였는데 문장이 오래도록 다듬은 것과 같아 일찍이 흐트러진 점들을 서로 이어지게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신흠이 항상 사람에게 말 하기를 “그와 같은 재주는 쉽게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일찍이 임진왜란의 일을 추기(追記)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懲毖錄』 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流行)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건의하여 처음으로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였는데 명나라 무장(武將)인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참고하여 포수(砲手), 사수(射手), 살수(殺手)의 삼수병(三手兵)를 뽑아 군용(軍容)을 갖추었다.

그리고 외방에 산성(山城)을 수축하였으며, 진관법(鎭管法)을 손질하여 방비책(防備策)으로 삼았다. ‘훈련도감’ 만은 존속되어 오늘에 이르도록 그 덕을 보고 있다.

향리에 있는지 10년 만에 졸 하였으니(1607년 5월 6일) 나이가 66세 였다. 이상은 『선조수정실록』 권41, 선조40년(1607년) 5월6일 졸기이다. 퇴계선생은 서애를 한번 보시고 “이 사람은 하늘이 낳은 사람이니 후일에 반드시 국가에 큰 공을 수립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명철한 판단력은 정치가적 소질을 인정한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에는 졸한 인물의 생평에 관하여 공식적으로 서술 평가한 기록이 있는데, 쓰는 사람의 주관적인 견해나 개인적인 회고 같은 것은 개입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실록實錄』의 편찬은 대개 전왕이 죽은 후 다음 왕의 즉위 초기에 이루어지는데, 춘추관 내에 임시로 설치된 실록청(또는 찬수청· 일기청)에서 담당하였다.

실록청의 총재관(總裁官)은 재상(宰相)이 맡았으며 대제학 등 문필이 뛰어난 인물이 도청(都廳) 및 각방 당상(各房堂上)으로 임명되었다. 『실록實錄』은 조선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여 수록하고 있는 ‘세계기록유산’으로 1997년에 지정된 귀중한 문화유산임은 물론, 조선시대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사료임에는 분명하다.


<전, 도산서원 재유사. 洪 永 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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