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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교훈(1)

admin 기자 입력 2019.09.22 19:35 수정 2019.09.22 07:35

↑↑ 황성창 작가
ⓒ N군위신문
역사는 현재의 변화가 아니라 과거의 변화를 대상으로 한다. 과거 사람들의 행위, 그것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친 행위를 대상으로 한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사실이 역사다. 영국의 역사학자 이드워드 H. 카아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라고 규정했다.

역사는 투쟁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결과는 우리가 그것을 좋다고 판단하든 나쁘다고 판단하든, 어떤 집단에 의해 다른 집단이 희생됨으로 해서 직간접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패배한 자는 엄청난 고통의 대가를 치루 게 되고 극단의 경우 역사에서 절멸되기도 한다. 역사의 모든 시기에는 승리와 함께 엄청난 불행도 있기 마련이다.

한 쪽의 행복은 다른 한 쪽의 희생을 정당화 한다는 주장은 국제사회에서 진리처럼 굳어져 있다. 우리나라 근대 100년사에 우리민족이 겪은 파란만장한 애환이 잘 소명(疏明)하고 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지,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 조선의 근대사 정치 형태와 너무나 흡사하다. 조선은 성리학 이념과 당파 이익에 따라 분열하면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조선 14대 선조 때 ‘기축옥사(己丑獄事)’사건이다. 서인이었던 정철이 정여립 모반 사건을 수사하면서 동인의 뛰어난 인물 천여 명을 처형했던 사건이다. 그 사건으로 조선 사회의 유능한 인재 절반은 괴멸(壞滅)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조선이 끝없는 진흙탕싸움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일본이 ‘정명가도(征明街道)’ 즉 명나라를 치려하니 길을 내 놓으라며 조선을 침략하였다. 정명가도를 빌미로 일으킨 전쟁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다.

7년간 이어지던 전쟁이 도요토미가 죽자 왜군이 철수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조선은 7년 전쟁으로 온 나라가 불타고 파괴돼 결딴났다.

선조 이전 약 200년 동안은 부분적인 외침을 제외하고는 큰 전쟁을 치른 적이 없던 나라였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17세기 동북아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중요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조선이나 명나라, 일본은 큰 변화를 겪게 됐다. 7년 전쟁으로 조선은 민생이 도탄에 빠졌지만, 반면에 난세의 영웅호걸이 나타나 백성들에게 큰 위안이 됐다.

특히 이순신, 권율 등의 용장과 의병장 곽재우의 활약은 조선에 유일한 희망을 안겨 주기도 했다.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침략 당한 구원은 있지만, 광해군은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해 단절되었던 대일 관계를 정상화 시켰다.

그 후 순조 때까지 12차례나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양국 간의 교역과 문화교류로 약 250여 년 간 평화를 유지했던 좋은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 1876년 개항 이후 ‘조선보호국화(朝鮮保護國化)’를 노리는 일본과, 조선을 근 천년 동안 속국(屬國)처럼 기득권을 주장하는 청나라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그 당시 러시아도 남방정책으로 조선을 탐하여 힐긋힐긋 넘볼 때다. 만주국의 이권에 눈독을 드린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정한론(征韓論)을 지지하고 대한제국의 조선보호국화를 승인하기에 이른다.

이어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했다. 반면에 고종은 개혁을 바라는 개화파를 살해하고 축출해 부국강병을 외치는 세력을 해외까지 추적하여 살해하고 절멸시켰다.

1910년 8월 22일 조선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찌가 전권을 위임받아 한일합방조약에 서명한다.

이어 조선 27대 순종이 일본 메이지천황에게 한국 통치권을 넘겨 대한제국은 35년간의 일제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역사학자 루키 디데스는 “강대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약소국은 그것을 인내해야 한다.”고 국제정치의 본질을 갈파한 적이 있다.

올해로 광복 74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71년째 되는 해다. 광복 이후 한국은 천지개벽 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7번째로 인구 5천만 명을 넘긴 국가가 되었고, 국민소득 3만 달러도 달성해 세계12권 경제대국 반열에도 올랐다.

이런 자랑스러운 나라의 정치가 삼류 같은 이념 갈등에 매몰되어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다.

정치 무늬만 우파(보수), 좌파(진보)로 바뀌었을 뿐 상대를 무시하는 정치 작태는 구한말만큼이나 난세다.

1910년대 나라를 말아먹은 친일 세력이 이 땅에서 소멸된 지 100년이 넘었는데도 올 여름 내내 친일이다, 반일로 서로가 삿대질로 정치가 난장판이다.
진보좌파라는 인사들은 400년 전처럼 의병도 일으키고, 죽 창 들고 일본과 싸우자고 난리들이다.
이 나라를 누가, 어떻게 지키고 일으킨 나라인가. 참다운 극일과 식민역사의 청산은 나라가 부국강병하면 자연스레 일본을 넘어 설 수 있을 것인데도 말이다. 한·일간의 지난했던 역사가 아무리 피에 얼룩졌을지라도, 한·일 양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존재하는 한 싸움은 안 될 말이다.

지금은 과거를 잊지 말되 증오하지 말고 나라의 번영을 위해 힘을 키우고 축적할 때다. 복잡한 동북아 속에서 일본과의 감정 대립은 자제하는 게 국익을 위해 좋지 않을까 싶다.

손자병법에 “삼십육계 줄행랑” 전술이 있다. 뜻은 상대방이 나보다 훨씬 강한 상대라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되면 도망가는 것도 상책이 된다는 뜻이다. 도망, 즉 후퇴는 패배가 아니다. 감정을 잠깐 추스르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전열을 가다듬는 시간을 벌자는 것이다.

승리의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보는 전술이다. 도망가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전략적 후퇴는 지혜로운 결단으로 볼 수 있다.

세종대왕의 명으로 1443년 일본을 다녀온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 “일본과 친하게 지내라”는 말을 기록으로 남겼다.

나라가 국제 사회의 주류에서 잘못된 선택으로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는 우는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유성용이 임진왜란 7년의 처절했던 전란을 회고하며 위정자의 한 사람으로 참회와 다시는 이런 참상이 나라에 없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기록한 수기가 국보 132호 ‘징비록(懲毖錄)’이다.

징비록은 군주가 역사를 임의로 재단하고 현실을 외면하면 국가에 변란이 닥친다고 외친 충정을 담은 수기다. 오늘 날, 한국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 같다. 독일 제국의 초대 총리 비스마르크는 “지혜로운 자는 역사에서 배운다.”고 했다. 과거의 뜻 깊은 실패들이 오늘의 자유와 평등을 성취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부는 다음호에 게재-

황성창 시인
부산연제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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