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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전흔(戰痕)

admin 기자 입력 2019.10.03 13:53 수정 2019.10.03 01:53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해 무더운 여름, 캄캄한 밤하늘에 별이 쏟아지는 다리 위에서 우리 식구들은 둘러앉아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따금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보이지 않은 선선한 바람 쐬며 쌓였던 하루의 피로를 풀고 있었다.

설핏 보이는 먼 산 위에서 불그스레한 불길이 어두움을 꿰뚫고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불길은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밤바람에 불기둥은 불꽃을 튕기며 사방을 훤하게 밝혔다.

어렴풋이 보이는 나무들이 불길에 싸여 승천하는 용처럼 몸을 비틀며 뒤척였다.
시커멓게 탄 나무들은 앙상한 기둥으로 남은 채 서 있었고, 어두컴컴한 산기슭에는 잔불만 시뻘겋게 달구고 있었다.

산마루에 타다 남은 나무는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면서 시커먼 몸을 가누지 못하고 회리바람꽃에 부대끼고 있었다. 마침내 해는 서산으로 떨어지고 앙상히 남은 기둥만 깜깜한 밤을 홀로 지새우고 있었다.

불길은 쉴 사이 없이 달려 코앞까지 바삭 다가왔다. 우리는 발을 동동거리며 한밤중에 짐을 싸 들고 피란길을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아버지는 집을 떠나 밖에서 지내야 할 자질구레한 것들을 챙기시고, 어머니는 반찬 만드시느라 정신없었다. 나는 돗자리 하나를 두 줄로 해서 어깨에 걸머지고 갈 준비를 했다.

황급히 떠나는 바람에 아버지가 잊으신 것 없을까 하고 한번 뒤돌아보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소를 앞세우고 피란길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매사에 꼼꼼하셨기에 그를 일이 없을 거다. 하시는 듯했다. 소를 앞세우고 가시는 아버지 뒤를 따랐다.

집 앞을 나서자 큰길은 피란길에 오르는 인파로 아수라장이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사람에 밀러 저절로 떠밀려 갔다. 여명이 틀 무렵 멀리서 들리든 포성이 점점 가깝게 들렸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가던 길을 멈추고 웅성거리며 동요가 있었다. 잠시 후 얼어붙었던 무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산으로 해가 질 무렵 또 멈췄다. 웬일인가 하고 사람들은 근심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군대 갈 나이에 있는 사람들을 징집(徵集)하고 있었다.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였다. 징집되어 가는 아들을 보고 울부짖으며 아우성치는 절규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두 눈을 뜨고 참아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를 자식을 전쟁터로 부모의 마음은 누가 알리오. 피란 중에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 자식과 생이별한 어머니들의 통곡하는 소리에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전쟁은 참으로 비참했다.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안고 어머니는 무리가 떠나가는 데로 또 따라가야 했다.

밤낮없이 몇 달을 걸었다. 발은 퉁퉁 붓고 몸은 지칠 대로 지쳐 한 발짝도 디딜 수가 없었다. 별이 쏟아지는 강변에서 며칠이 지나도록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이 점점 더 뚜렷하게 들려온다. 제트기는 쉴 사이 없이 머리 위를 지나가고 한다. 인민군이 낙동강 방어선 최후의 보루인 다부동까지 쳐내려왔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국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로 불리는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과 인민군은 공격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한 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형국이었다.

대구 부산만 남겨 놓은 인민군은 승리를 코앞에 둔 것과 다름없었다.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계속 밀어붙인다.

전시상황이 긴박했을 때 군사·의료·물자지원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戰勢)가 뒤집혔다는 소문이 들렸다. 숨죽여 지내든 사람들은 일시에 양팔을 치켜들고 만세 하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피란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부동 전적지를 지나서 왔다.
시체가 너절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여 코를 들지 못했다. 한 핏줄 한 형제인데 무슨 원수이기에 저토록 피 흘려가며 싸우다 죽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집에 도착하니 집은 뼈대만 앙상히 남았을 뿐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아직도 검은 연기가 바람에 나부낀다. 먹을 거라고는 허옇고 멀건 나물죽과 나무껍질과 풀뿌리가 전부였다. 여기에서 좌절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으로 잘 살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만들어 보자고 온 국민이 똘똘 뭉쳤다. 1970년 개통한 경부고속도로는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바꾸고 한국 경제의 대동맥이 되었다. 잇따라 제철 전자 조선 산업이 활기를 띠면서 우리나라는 명실공히 산업국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피땀 흘린 대가가 오늘날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시대로 탈바꿈하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경제성장 이후 소득 수준과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삶의 질과 생활 환경도 급격히 변했다. 입어보거나 맛볼 수 없었던 옷이나 음식도 무시(無時)로 살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형편을 보면 더욱 그러한 느낌이 들었다.

이젠 물질 만능 주의라기보다 풍요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아득히 먼 그 옛날 헐벗고 굶주렸던 그때 그 시절을 잊어버리고 살아간 지가 오래되었다.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산 중턱에는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 보루인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 3사단을 격멸한 백선엽 장군 공적비가 있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군이 1m 간격으로 포탄을 비 오듯 퍼부었다고 한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 가를 짐작게 한다.

아직도 어머니 품에 돌아가지 못하고 지하에서 통곡하고 계신 영현들의 유골을 찾아 부모님 곁으로 모시고, 지난날 쓰라렸던 고통을 잊으시고 편안히 쉬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도 다부동 전적지에서 유골을 찾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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